항목 ID | GC09100637 |
---|---|
이칭/별칭 | 상주 상현리 태봉 태실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377-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창국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501년 - 화서면 태봉산의 태실과 태실비 건립 |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94년 - 화서면 태봉산의 태실과 태실비 화서면 태봉산의 태실 석함 복원 |
현 소재지 | 화서면 태봉산의 태실과 태실비 -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377-1 |
성격 | 태실|태실비 |
관련 인물 | 이황|연산군 |
크기(높이,길이,둘레) | 높이 26㎝, 둘레 최대 344㎝[태실 석함]|높이 15㎝, 너비 63㎝, 두께 36㎝[비석 받침]|높이 105㎝, 너비 50㎝, 두께 22㎝[비신]|높이 50㎝, 너비 56㎝, 두께 37㎝[비수]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에 있는 연산군의 원자 이황 태실.
[개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태를 봉안하는 곳이다. 크게 아기태실과 가봉태실(加封胎室)로 구분되는데, 가봉태실은 아기태실의 태주가 왕이 되면 석물을 추가 의장하고 가봉한 태실을 말한다. 화서면(化西面) 태봉산(胎封山)의 태실비(胎室碑)는 아기태실에 해당한다. 상현리 태실의 태주 ‘원자 금돌이 이황(元子金乭伊李𩔇)’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둘째 아들로 중종반정으로 폐세자가 되어 1506년(중종 1) 사사되었다. 화서면 태봉산의 태실과 태실비는 상주 상현리 태봉 태실석이라고도 한다.
[건립 경위]
‘금돌이 이황’의 장태(藏胎)는 1501년 7월 초2일 이루어졌으며, 태실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 서삼릉으로 이전되었다. 태함을 제외한 유물[태지석(胎誌石), 내외 태항아리, 동전편]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태지석에는 ‘황명 홍치십년 십이월 이십구일 자시생 원자 금돌이아기씨 태 홍치십사년 칠월 초이일 미시 장(皇明 弘治十年 十二月 二十九日 子時生 元子 金石乙伊阿只氏 胎 弘治十四年 七月 初二日未時藏)’이 새겨져 있다.
[위치]
화서면 태봉산의 태실과 태실비는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377-1번지에 있다. 화서면 신봉리에 있는 화령공용버스터미널 서쪽에 태봉산이 있는데, 산 정상부에 태실이 있었다. 현재 태봉산은 태봉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형태]
태봉산 정상부에 있는 태봉정 북서편 뒤편에 태실 석함이 있는데, 높이 126㎝, 둘레 최대 344㎝이다. 뚜껑이 열린 채로 있던 것을 1994년 복원하였다. 태봉산 정상부 남쪽 10m 아래쪽에는 비석 받침, 비신, 하엽형(荷葉形)의 비수로 구성된 아기태실비가 있는데, 비신의 앞뒷면이 바뀌어 있는 상태이다. 비신 앞면에는 ‘원자태실(元子胎室)’, 뒷면에는 ‘홍치십사년 칠월 초이일 입석(弘治十四年 七月 初二日 立石)’이 새겨져 있다. 비석 받침은 높이 15㎝, 너비 63㎝, 두께 36㎝, 비신은 높이 105㎝, 너비 50㎝, 두께 22㎝, 비수는 높이 50㎝, 너비 56㎝, 두께 37㎝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화서면 태봉산의 태실과 태실비에 대한 정밀 발굴 조사는 실시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태실을 서삼릉으로 이전하면서 파헤친 뒤 다시 복원하지 않았으며, 이후 정상부를 평탄하게 조성하여 태봉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1994년 화령국민학교 제4회 졸업생들이 ‘태봉정 건립 취지문’이라는 비석을 건립하였다.
[현황]
화서면 태봉산의 태실과 태실비의 안내문과 『상주시사』 등에 표현된 ‘금표비’는 ‘아기태실비(阿只胎室碑)’로 명칭이 변경되어야 하며, 상주 지역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비라고 하였으나 최근 개운동 산44번지에서 1443년 세워진 김제조씨비가 발견되었으므로 내용 수정이 필요하다.
[의의와 평가]
화서면 태봉산의 태실과 태실비는 모동면 상주 상판리 태실, 함창읍 태봉리 태실과 함께 경상북도 상주 지역의 태실 문화를 알 수 있는 기초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