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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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에 있던 조선 전기 경상도 행정의 중심 상주 감영에 관한 이야기.
[개설]
‘경상도(慶尙道)’라는 명칭은 낙동강을 기준으로 좌도와 우도의 중심지인 경주와 상주의 고을명에서 유래하였다. 이러한 이름은 상주가 경주에 버금가는 위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 후기 상주가 급격히 성장하여 도명에 반영되었고, 조선 건국 이후 위상을 역전시켜 한 도를 관장하는 자리까지 이르렀다. 세종 연간 다른 도는 유수부가 본영(本營)이 되는데 경상도는 상주에 감영이 설치되었다. 교통의 중심지로서 정치적 명분과 진공(進貢) 등의 현실적 이해관계가 상주에 있었고, 경제적 규모에서도 경주보다 컸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 경상감영은 1년 임기의 관찰사가 경상도 전체 고을을 순력하는 가운데 거점 고을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조선 후기 경상감영과 같은 별도의 관아를 두지 않았으나 객사인 상산관(商山館), 풍영루(風詠樓), 응신루(凝神樓), 읍성 내의 대창(大倉)이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 전기 상주가 감사의 행영(行營)이었던 만큼 상산관에서 머물며 각종 의례를 집전하고, 누 아래에서 진상품을 감봉(監封)하였다. 또한 경상도 각지에서 올라오는 세곡을 저장하는 대창을 읍성 내에 건립하여 관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주 감영은 경상도의 분도로 경상우도 감영으로 운영되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술적·행정적·경제적 사유로 대구부로 감영이 이전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상주목의 성장과 감영의 설치]
1012년(현종 3) 상주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를 설치하여 경주와 진주를 관할하였고 1014년(현종 5)에 안동대도호부를 경주로 옮기고 안무사(安撫使)를 설치하였다. 1314년(충숙왕 원년)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경상도(慶尙道)로 개칭한 이후 조선에서도 그대로 시행되었다. 한편 조선 초기 8도제와 관찰사 제도를 시행하였지만 국왕-관찰사-수령으로 이어지는 명령 체계가 전국적으로 확고히 자리 잡지는 못하였다. 이에 계수관(界首官)의 협조가 필요하여 세종 대까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상주는 고려 이래로 세조 대까지 이어져 온 계수관 제도에 따라 계수관으로서 광역주(廣域州)의 역할을 하였다.
계수관의 기본적 기능은 주변의 군현을 영솔함에 있었다. 계수관은 지방 고을을 통제하고, 부세를 거두어 중앙에 보내는 지방의 거점이었다. 또한 각종 교육·문화 사업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대규모 간행 사업을 맡아서 지방의 지식 확산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각종 향촌 공동체의 제례를 주도하여 향민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의료 기관을 설치하여 지방민의 구제를 담당하였다. 특히 상주는 조선 전기 관찰사영이 설치되면서 심약(審藥)이 배속되었고, 조선 후기 감영이 대구로 이전하자 사설 의국인 존애원(存愛院)이 만들어져 기능을 대신하였다.
이 외에도 군정의 기능을 담당하여 지방군을 통제하였다. 실제 상주에는 태종 연간 도관찰사 영상주목사(領尙州牧使), 진주상주도 병마도절제사(晉州尙州道 兵馬都節制使)가 임명되고, 세종 대에는 거진(巨鎭)인 상주진에 절도부사(節度副使)를 설치하였다. 조선 전기 상주는 감영이 설치된 도의 치소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감영이 몇 차례 이동 끝에 대구도호부로 이전하면서 조선 후기에는 상주목 자체의 기능만 남았다. 하지만 상주는 계수관이 지니는 다양한 기능을 유지하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상주진의 군사적 편제 권한이 유지되었다. 조선 후기에도 목민관 이외에 진영장(鎭營將)이 증설되어 진영[경상좌영]이 고을 인근에 별도로 자리하였다. 평화가 지속되면서 진영은 토포영(討捕營)까지 겸하였다. 이처럼 계수관은 대읍의 수령으로서 순찰관, 행정관, 군정관(軍政官)의 직임을 지녔다. 그래서 종2품에서 종3품에 이르는 고관 중에서 선발하였다.
하지만 지방 제도가 확립되면서 기능이 약화되어 1456년(세조 2) 군현의 병합사목(竝合事目)이 시행되면서 사라졌다. 경상도의 계수관이었던 상주는 이때부터 광역주로서의 위상은 사라지고 목(牧)의 위상만 남게 되었다. 관할하는 범위도 축소되어 이전의 1목, 1도호부, 3군, 7현에서 화령현, 중모현, 단밀현, 산양현, 장천부곡만 남았다. 그리고 진관(鎭管) 체제의 시행으로 성주목, 선산부, 김산군, 개령현, 지례현, 고령현, 문경현, 함창현 등이 상주의 지휘 하에 있었지만 담당관은 목사가 아닌 진장(鎭將)이었다. 이처럼 행정적으로는 위상이 약화되었지만 군사적으로는 여전히 상주진(尙州鎭)이 존속하여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경상도 감영은 고려 말부터 경주에 있었으나 1408년(태종 8) 상주목(尙州牧)에 설치하였고, 경상감사가 상주목사를 겸하였다. 그러나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의 기록을 보면 상주가 개국과 동시에 감영이 있었다고 한다. 경상감영이 경주에서 상주로 바뀐 이유는 경주가 본영일 때에도 상주에서 진상(進上)과 공사(公事)를 행하여 감영의 역할을 하여 왔고, 왕이 있는 한성부와 가깝기 때문이었다. 실제 평안도 평양감영, 전라도 전주감영, 강원도 강원감영, 경기도 광주감영, 황해도 해주감영은 모두 한양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또한 『세종실록』에서도 “경주에 본영(本營)을 두고 있을 때에도 상주를 유영(留營)으로 하여 진상과 잡다한 공사는 모두 상주에서 행하였다”라고 하였다. 1408년(태종 8)부터 상주가 본영이라 불렸지만 이전부터 상주는 유영 또는 행영(行營)으로 불리면서도 실질적으로 경상감사의 본영으로 운영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하지만 익숙해질 때까지 한동안 경주 또한 본영으로 불렀다.
[조선 전기 상주 감영의 운영]
조선 전기 감영의 기능은 관찰사의 임기 1년 동안 도내 제읍을 항상 순력(巡歷)하므로 도정(道政)을 종합하는 중심지 내지 관찰사가 순력시에 일시 휴식하는 곳으로서의 의미가 강하였다. 그래서 전쟁의 위험이 높은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관찰사가 가족을 거느리고 부임하여 장기간 근무하였기에 관아 건물이 있었지만 나머지 6도에는 감영의 관아 건물이 없었다. 경상도의 경우 관찰사는 1년의 임기 동안 단신으로 부임하여 감영에 별도의 읍관(邑官)을 두고 도내 관할 구역을 순력하면서 관찰출척(觀察黜陟)하였다. 계수관 가운데 비교적 크고 지리적으로도 한성부와 가까운 도계(道界) 지점이며, 도내를 순력하면서 임무를 수행하기 편리한 상주에 감영을 설치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조선 전기 8도 체제가 확립되면서 상주목사는 한때 경상도 감사(監司)의 직무를 겸하고 상주는 감사가 머무는 행영이 되기도 하였다. 이원(李原), 안순(安純), 한옹(韓雍) 등이 1408년부터 1414년까지 도관찰 출척사 겸 상주목사(都觀察 黜陟使 兼 尙州牧使)였다. 이후 1448년(세종 30)부터 1454년(단종 2)까지 민공(閔恭), 이인손(李仁孫), 이숭지(李崇之), 김순(金淳) 등이 다시 도관찰 출척사 겸 상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조선 전기 경상감사가 상주목사를 겸한 시기는 모두 12년 동안이었다. 상주는 1601년(선조 34) 대구부에 감영이 정착될 때까지 경상도에서 감사가 주로 머물고 상주목사를 겸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이처럼 상주는 관찰사가 순력하는 과정에서 규모가 크고 부유한 계수관으로서 주영(主營) 또는 유영으로 존재하면서 도내의 각종 공사 집행의 중심지, 진상 봉상(封上), 감시(監試) 및 도내 각종 공부(公簿)의 보관소 기능을 담당하였다. 또한 관찰사의 민정부관(民政副官)인 도사(都事)[종5품] 이외에 판관(判官)[종5품]을 증설하여 민정을 맡겼고, 관찰사의 군정부관(軍政副官)인 순영중군(巡營中軍)[정3품]은 직할 부대를 맡았다. 조선 후기에는 감영이 대구로 이전되자 상주목사가 민정을 맡고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로 군정을 보좌하였으며, 상주진 전체는 별도의 진영장(鎭營將)[정3품 당상]이 군정을 통솔하였다.
[조선 전기 상주 감영의 변천]
조선 전기 조정에서는 경상도가 “땅이 넓고 인구가 많다[地廣人衆]”는 이유로 일시적으로 분도(分道)를 하기도 하였다. 1407년(태종 7) 낙동강을 경계로 강의 서쪽을 우도(右道), 동쪽을 좌도(左道)로 한 적이 있고, 1519년(중종 14)에는 우도감사가 상주목사를 겸하고, 좌도감사는 경주부윤을 겸하게 한 적도 있다. 1497년(연산군 3) 이극균(李克均)이 경상우도 지도(慶尙右道 地圖)를 올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좌·우도로 분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왜군이 경상도를 점령하여 도로가 끊겼을 때도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좌도는 경주, 우도는 상주에 감영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병력과 물자를 집중하기 위하여 좌우도의 외곽에 치우진 상주와 경주보다 경상도의 중심부에 감영을 두어 지휘를 효율적으로 하고자 하였다. 1593년(선조 26) 감영을 성주의 속현인 팔거현(八莒縣)[현재의 칠곡군]에 두었다가 1595년(선조 28) 다시 좌·우도로 나누어 감영을 분리하였다. 하지만 지휘의 일원화와 운영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1596년 감영을 대구 달성에 두었다. 이후 전황에 따라 감영은 이동하였는데 1599년(선조 32) 임시로 북쪽인 안동에 설치하였다. 하지만 감영 운영에 필요한 경제적 이유로 1601년(선조 34) 대구부에 감영이 정착되었다. 이처럼 1408년부터 1593년까지 경상감영은 상주에 있었으며 좌·우도로 분도하였을 때에도 우도 감사의 본영은 상주였다. 한편 조선 후기 감영의 이동으로 상주의 도 전체에 대한 영향력은 줄어들었으나, 상주가 인근 고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유의 거점 관할 기능까지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