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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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Sangju's Donghak Farmers' Army and Conservative Jipgangso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신진희 |
관련 지역 | 상주관아 터[왕산역사공원] - 경상북도 상주시 서성동 163-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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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역 | 동학농민군 근거지 임곡리 - 경상북도 상주시 화남면 임곡리 |
관련 지역 | 남사정 터 - 경상북도 상주시 남성동 |
관련 지역 | 중모시장 터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용호리 |
관련 지역 | 화령 장터 -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 |
관련 지역 | 광주원 터 - 경상북도 상주시 화남면 상용리 |
관련 지역 | 대접주 김현영 집터 - 경상북도 상주시 모서면 삼포리 |
[정의]
1894년 경상도 상주에서 벌어졌던 동학농민군과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려던 보수집강소 및 상주소모영에 관한 이야기와 그 현장.
[개설]
경상북도 상주 지역은 이른 시기부터 동학이 뿌리를 내렸다. 동학 창교 초기인 1862년부터 활동이 확인되며, 1863년에는 상주 유생들이 동학 배척을 위한 통문을 돌리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894년 6월 일본군이 불법적으로 경복궁을 침범한 이른바 갑오변란이 일어나자, 상주의 동학 세력은 농민군을 형성하였다. 9월 22일 무렵 상주 읍내로 들어가 관아를 장악한 상주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 병참 기지를 공격하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이에 9월 28일 일본군은 읍성을 공격하여 농민군을 격퇴시켰으며, 일본군이 철수한 뒤에는 상주 관아의 향리들이 주축이 되어 동학에 대응하기 위한 보수집강소(保守執綱所)를 결성하게 된다. 상주 지역 곳곳에는 동학농민군과 보수집강소가 활동하였던 현장이 남아 있다.
[상주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보수집강소의 결성]
1894년 동학의 전라도 일대에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이에 동학 제2대 교주이자 북접(北接)을 이끌던 최시형(崔時亨)은 충청도 보은의 청산(靑山)에 각 고을 두령(頭領)을 소집하고, 두령들의 의견에 따라 9월 18일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최시형이 기포령(起包令)을 내려 각 고을의 농민군이 황간·영동 지역으로 집결하였으며, 그와 별개로 경상도 북서부의 농민군 조직은 그동안 억제하여 왔던 읍내 점거를 시도하게 된다. 동학농민군은 대읍이었던 상주와 선산 관아를 공격 목표로 삼았는데, 일본군 병참 기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9월 22일 함창·예천·상주의 동학농민군은 상주 읍내의 관아를 점령하고, 일본군 병참 기지를 공격하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은 청과의 일전을 대비하기 위하여 부산에서 서울까지 전선 가설을 서둘렀다. 7월 중순 무렵이 되자, 부산·구포·삼랑진·물금포·밀양·청도·대구·다부역·낙동·해평·태봉·문경 등에 전선이 설치되었으며, 이를 관리하는 병참부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이에 반감을 품고 일본군을 물리치려 하였다. 상주 관아를 장악한 동학농민군이 일본군 병참 기지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군은 9월 28일 10시, 상주읍성을 먼저 공격하였다. 화력이 우세한 일본군은 ‘줄사다리’라고 부르는 조교(弔橋)를 사용하여 성벽을 넘어 들어왔다. 3시간여의 접전을 벌였으나, 훈련되지 않은 동학농민군은 50명의 전사자와 2명의 포로를 남기고 퇴각하였다. 상주 관아 창고에 있던 무기는 일본군이 수색하여 모두 낙동병참부로 가져갔다. 동학농민군과 접전을 벌인 일본군은 부산수비대에서 파견된 후지타[藤田] 부대였다. 후지타 부대는 하사 4명, 병졸 60명, 통역 2명, 인부 10명의 규모로 8월 29일 낙동에 도착한 후 낙동병참사령관으로부터 진압 지시를 받고 상주를 공격하였다.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이 모두 퇴각하자, 상주에서는 향리들이 주축이 되어 ‘집강소(執綱所)’라는 이름의 민보군(民堡軍)을 결성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감영(監營)·진영(鎭營)의 병정을 동원토록 하고 그 지휘관에게는 토포사(討捕使)·조방장(助防將) 등의 직책을 겸임케 하였다. 또한 민보군 지휘자에게는 소모관(召募官)이라는 직함을 부여하였다. 9월 29일 기준으로 삼남(三南) 요지에 임명된 소모사는 모두 현직 지방관이었으나, 상주소모사만 유일하게 전 승지(承旨) 정의묵(鄭宜默)이 선임되었다.
10월 17일 상주소모사에 임명된 정의묵은 10월 20일 장관청(將官廳)이던 벽유당(碧油堂)에 소모영(召募營)을 설치하였다. 다음 날인 10월 21일 소모영 운영 규정인 ‘소모절목(召募節目)’을 공포하였으며, 이에 호응하여 24일 상주 지역 보수 유림들이 향회를 열고 소모영을 조직하였다. 정의묵은 유생 김석중(金奭中)을 유격장(游擊將)으로 임명하고 12월 6일까지 농민군 근거지를 토벌하였다. 10월 22일 태평루(太平樓) 앞 형장에서 동학농민군 9명을 처형한 것을 시작으로 11월 7일에는 임곡(壬谷)의 농민군 지도자 강선보(姜善甫)가 태평루 앞에서 효수되었다. 11월 22일 체포된 농민군 지도자 남계일(南戒一)·손덕여(孫德汝)·최선장(崔善長)·이의성(李義城)·장판성(張判成), 피색장(皮色匠) 억손(億孫) 등 6명이 24일 역시 태평루에서 총살되었다. 12월 14일에는 전날 체포된 남촌(南村)의 ‘거괴(巨魁)’ 최인숙(崔仁叔)과 윤경오(尹景五)·김순녀(金順汝)·전명숙(全明叔) 등 4명이 태평루 앞에서 효수되었다.
상주 관아가 있던 곳은 현재 왕산역사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그 가운데 태평루 터에는 표지석만 남아 있으며, 관아의 객사였던 상산관과 태평루는 ‘상주임란북천전적지기념공원’에 이전되어 있다.
[임곡리 강선보의 동학농민군 활동과 머리무덤]
경상북도 상주시 화남면 임곡리는 1894년 당시 진주 강씨와 인동 장씨 집성촌이었다. 상주 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 강선보가 살던 마을이었으며, 화북 동학농민군의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가파른 고개를 넘어야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피란처로 삼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또한 임곡리는 동학 교단 본부가 있던 충청도 보은 장내에서 화령·상주로 통하는 길목에 있고, 동학농민전쟁 당시 상주 지역에서 농민군 세력이 특히 강성하였던 화북·화서·화동·모서·모동면 중 화북면에 속하는 마을이다. 평민이나 천민뿐만 아니라 양반 후예 가운데서도 동학농민군에 가담하는 자들이 나와, 농민들과 함께 양반 지주와 토호를 공격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강선보이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상주소모영에서 남긴 「소모사실(召募事實)」에 강선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화북면 임곡에 거주하는 강선보는 평소부터 행패를 부리고 나쁜 짓을 자행하여 동네 사람들이 이를 갈고 있었는데, 동도(東徒)[동학]에 들어간 뒤로는 이를 기회로 여기고 스스로 포도대장(布道大將)이라고 칭하며 무리들을 불러 모으고 기치를 늘어세우니, 그 행동이 흉악하고 참혹하며 그 광경이 사람들을 두렵게 하며 가는 곳마다 난동을 부리는 것이 끝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강선보는 소문이 자자한 동학의 ‘거괴(渠魁)’였기 때문에 상주소모영이 설치된 뒤 소모사가 가장 먼저 달려가서 강선보를 체포하였다. 강선보의 체포 경위와 날짜는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지만, ‘거접(巨接)’으로 표현된 외남면 하병리의 강홍이(姜弘伊), 공성면 소리의 김경준(金景俊)과 같은 시기에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강선보 등은 소모영에 구금되어 있다가 11월 7일 처형되었다. 처형에 앞서 상주 관아의 문루인 태평루 앞에서 소모사 정의묵(鄭宜默), 상주목사(尙州牧使) 이만윤(李晩胤), 상주진영장(尙州鎭營將) 류인형(柳寅衡)의 문초를 받았다. 문초 후 강홍이와 김경준은 모두 남사정(南射亭)으로 옮겨져 총살되었지만, 강선보는 주민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11월 7일 정오 무렵 상주읍성 관아 정문인 태평루 앞에 효수되었다. 강선보의 늙은 어머니가 효수된 머리를 몰래 치마폭에 싸서 돌아와 임곡리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눈에 띄지 않는 개울가에 급히 묻었다고 한다. 강선보의 일명 ‘머리무덤’은 임곡리 마을 입구 옛 채석장 터에 비석과 함께 있다. 그러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가지 않으면 찾기 힘들다.
[남사정에서 처형된 동학농민군]
상주읍성은 남쪽 홍치구루(弘治舊樓), 북쪽 현무문(玄武門), 동쪽 공락문(控洛門), 서쪽 읍로문(邑露門)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사정은 그 가운데 남쪽 문인 홍치구루 바깥에 있던 건물이다.
상주 보수집강소는 1894년 11월 7일 외남면 하병리에 살던 접주 강홍이와 공성면 소리의 접주 김경준 등 2명을 남사정 아래에서 총살하였다. 1894년 12월 12일 오전에는 소모사가 직접 군사와 백성들 1,000여 명을 소집하여 남사정에 나가서 11월 29일 이후 체포한 이득이(李得伊)·박기봉(朴起奉)·권화일(權和一)·김순오(金順五)·이도생(李道生)·배춘서(裵春瑞)·박창현(朴昌鉉) 등 7명 가운데 이득이와 박기봉을 효수하고, 권화일 등 5명을 총살하였다. 열흘 뒤인 12월 22일에는 상주 경내에서 체포되어 소모영으로 끌려왔던 상주의 박효식(朴孝植), 충청도 영동의 김흥업(金興業)·김경학(金慶學), 청산의 안소두겁(安小斗劫)·김유성(金有成)·박기준(朴基俊)·지상록(池相彔), 황간의 김사문(金士文)·이상신(李尙信)·신윤석(申允石) 등 10명 가운데 박효식을 효수하고, 김흥업 등 9명을 총살하였다. 다시 이틀 뒤인 12월 24일에는 상주 내서면의 전오복(全五福), 갈곡 이규삼(李圭三), 화령 장터의 이태평(李太平) 등 3명을 남사정에서 총살하였다.
많은 동학농민군이 죽임을 당한 남사정의 위치는 현재 정확하게 비정할 수 없다. 1912년 상주읍성의 성첩과 문루를 헐고, 시가지와 도로를 만들었으며, 성 둘레의 호는 메워 없앴기 때문이다.
[중모시장과 화령장에서 처형된 동학농민군]
1894년 11월 13일 상주소모사 정의묵에게 자청하여 유격장이 된 김석중은 바로 13일 밤 민보군을 이끌고 농민군 지도자 체포에 나섰다. 모동·화동·화서·화령 등 상주뿐만 아니라 충청도의 보은·청산·영동 등 지역으로 진격하여 곳곳에서 농민군 지도자를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김석중은 11월 13일 밤 10시쯤 참모인 사인(士人) 성호원(成灝源)·윤흥렬(尹興烈)·성걸(成杰), 동생인 김직중(金稷中) 및 초장 박유현(朴裕顯)·김상오(金常五)·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별포 20명을 거느리고 소모영을 출발하여 14일 새벽 모동으로 향하여 용호리에 도착하였다. 모동은 상주 31개 면 가운데 화북·화동·화서·모서 등과 함께 농민군 세력이 특히 강성하였던 지역이다.
모동에 도착한 김석중은 군사를 2개 대로 나누어 용호리에서 접주 남진갑(南進甲)·이화춘(李化春), 사제(社堤)에서 접사 구팔선(具八善)·김군중(金君仲)과 상주 관아의 군기 탈취에 앞장선 유학언(劉學彦)을 체포하였다. 김석중은 이 가운데 이화춘·구팔선·김군중·유학언 등 4명을 11월 14일 낮 12시경 중모시(中牟市)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문초한 후 포살하였다. 남진갑은 접주로서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을 거느렸고, 상주읍성에서 물러난 후 몰래 기포를 준비하고 있었다. 남진갑은 체포된 날 밤을 틈타 도주하였다가 11월 27일 최시형의 은신처였던 보은군 마로면 현면상(玄緬相)의 집에서 다시 체포된 후 다음 날 28일 청산 월남에서 총살되었다.
이화춘의 집에서는 총 5자루가 발견되었고, 유학언의 집에서도 총 1자루와 탄환 등이 발견되었다. 이화춘 등은 김군중·구팔선과 함께 11월에 다시 상주를 함락하고 무기를 탈취하려는 거사를 계획하고 ‘기포통문’을 만드는 등 재기를 도모하다가 체포되었다. 김군중의 족보 이름은 김현동(金顯東)인데, 모서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김현영(金顯榮)의 동생이다. 이들 김현영·김현동·김현양(金顯揚) 3형제가 모두 동학에 입도하여 지도자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맏형 김현영은 1892년 접주로 임명되었으며, 1894년에는 대접주로서 상주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하였고, 동생인 김현동·김현양은 접사로 활동하였다. 중모 장터에서 김현동은 상주소모영 유격장 김석중에게 잡혀 포살되었지만, 김현동과 김현양은 동학농민전쟁이 끝난 후에도 동학에 관여하다가 각각 1911년과 1945년 사망하였다. 김현영 형제의 집은 모서면 삼포리에 있다.
김석중은 11월 14일 용호리와 사제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이화춘·구팔선·김군중·유학언 등 4명을 체포하여 중모시에서 포살하고, 11월 15일에는 외남(外南) 왕곡(旺谷)으로 가서 조왈경(趙曰京)을 체포하여 역시 다음 날 16일 처형하였다. 이어 18일에는 화서면 대곡(垈谷)에서 청주대접주 김자선(金子先), 접사 서치대(徐致大), 접주 정항여(鄭項汝)를 체포하였다. 김석중의 보고에 따르면 김자선은 본래 보은 장내리에 거주하는 대접주였으며, 10월 17일 무리 4,500명을 거느리고 청주를 함락하려고 세교(細橋) 장터에 이르렀으나 일본 병력에 패배하였다. 이후 상주에 잠입한 김자선은 다음 기포를 준비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자선·정항여·서치대는 19일 화령(化寧) 장터에서 총살되었다. 상주소모사 정의묵이 쓴 「소모일기」에 따르면, 김석중은 11월 22일에도 화령 장터에서 ‘동괴(東魁)’ 8명을 총살한 것을 보고하였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화령 장터는 계속 동학농민군의 처형지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상주소모영 유격장 김석중이 동학농민군을 참살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던 중모시장은 더 이상 장이 서지 않게 되면서 사실상 기능이 폐지되었으나, 장터 부지는 그대로 있다. 화령 장터도 장터의 기능은 사라졌다.
[광주원에서 처형된 동학농민군]
경상북도 상주시 화남면에서 화령 쪽으로 약 1㎞ 거리에 광주원(廣酒院)이라는 조선 시대 역원(驛院)이 있었다. 광주원에서 유격장 김석중이 동학농민군을 처형하였다.
유격장 김석중은 상주와 경상도 북부 지역만이 아니라 충청도 영동·청산·보은 등의 지역으로 진출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다. 동학농민군 진압 기록인 「소모사실」, 「소모일기」, 「토비대략」을 살펴보면, 1894년 11월 19일 보은군 장내(壯內) 후동(後洞)에서 김석중은 봉산접주(鳳山接主) 김민이(金民伊)와 금천접주(錦川接主) 원성팔(元性八)을 체포하였고, 20일 새벽 4시경에는 다시 상주 평온리로 돌아와 김달문(金達文)·강만철(姜萬哲)·김철명(金哲命) 등을 체포하였다. 평온리는 화남면에서 화령 반대쪽에 있는 마을인데, 광주원과 멀지 않은 곳이다. 김석중은 충청도 보은에서 봉산접주와 금천접주를 체포하였는데, 금천접주인 원성팔은 광주원, 봉산접주였던 김민이는 봉암(鳳巖)에서 각각 총살하고, 평온리에 있던 김달문·강만철·김철명을 붙잡았다. 김석중은 그들 중 김달문과 강만철을 몇 시간 후 광주원에서 총살하였다.
현재 광주원 터는 국도 제25호를 따라 화남에서 화서 방면으로 가는 길 오른편 상용리 버스승강장 뒤 도로변에 있다. 해당 장소는 현재 밭으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