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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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音里火停 |
영어공식명칭 | Eumrihwa-j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방용철 |
관할 지역 | 음리화정 -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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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통일 신라 시대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일대에 있던 지방 군단 조직.
[개설]
삼국 통일 후 신라는 군사적 요충지에 정예군을 주둔시켰던 정(停) 제도를 재정비하여 전국 9주(州)에 10정을 설치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雜志)9 무관(武官) 조에는 음리화정(音里火停)이 10정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는데, 휘장은 푸른색이었다. 군 지휘관은 중앙에서 파견하였는데 대대감(隊大監) 1명, 소감(少監) 2명, 대척(大尺) 2명, 삼천당주(三千幢主) 6명, 삼천감(三千監) 6명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음리화정의 설치는 544년(신라 진흥왕 5)으로 되어 있지만 『삼국사기』에서 삼국 통일 이전 상주 지역에 상주정(上州停)을 운용한 기록이 확인되므로 조직이나 성격 등에 일정한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삼국 시대부터 신라는 효율적인 군사 활동을 위하여 지방의 요충지에 ‘정’을 설치 및 운용하였다. 삼국 통일 이후에는 전국의 9주에 각 1정씩[한주(漢州)는 2정] 10정으로 확대·발전시켰다. 상주 지역에는 525년에 이미 대아찬(大阿飡) 이등(伊登)을 사벌주(沙伐州) 군주(軍主)[정의 사령관]로 파견한 기록이 있어 통일 이전부터 군사 요충지로서 정이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벌주는 신라가 백제를 정벌할 때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이 주둔하였던 금돌성(今突城)이 있었고, 나당 전쟁 때에도 중요한 격전지였으므로 삼국 통일 이후 지방 군단의 배치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권40 잡지9 무관 하(下) 조에는 10정을 소개하면서 “혹은 삼천당(三千幢)이라고 한다. 첫째는 음리화정, 둘째는 고량부리정(古良夫里停), 셋째는 거사물정(居斯勿停)으로 금장은 청색이다. 넷째는 삼량화정(參良火停), 다섯째는 소삼정(召參停), 여섯째는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으로 금장은 흑색이다. 일곱째는 남천정(南川停), 여덟째는 골내근정(骨乃斤停)으로 금장은 황색이다. 아홉째는 벌력천정(伐力川停), 열째는 이화혜정(伊火兮停)으로 금장은 녹색이다. 모두 진흥왕 5년에 두었다”라고 밝혔다. 이보다 앞서 무관의 명칭을 소개한 제군관(諸軍官) 각 항목에서는 “마병(馬兵)을 거느리는 대대감, 음리화정에 1인”, “기병(騎兵)을 거느리는 소감, 2인”, “기병을 거느리는 화척(火尺), 2인”, “삼천당주는 6인, 관등[位]은 사지(舍知)부터 사찬(沙湌)까지로 임명한다”, “삼천감은 6인, 관등은 사지에서 대나마(大奈麻)까지로 임명한다” 등 무관의 인원수와 임명 가능한 관등 등을 밝혔다.
한편 고선사 서당화상비(高仙寺 誓幢和上碑)에는 비문을 새긴 인물로 “음리화 삼천당주(音里火三千幢主)인 급찬(級飡)”의 성명 부분이 마멸된 이가 단편적으로 확인된다.
[변천]
『삼국사기』 잡지 무관 조 기사의 전체 구성이 소략하고, 시간적 범위가 제한적인 까닭에 음리화정의 연원과 변천 과정 등은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든 실정이다. 다만 음리화정이 포함된 통일 신라 시대의 10정은 이전 시기의 전통적인 ‘정’ 제도를 계승·발전하였으며, 주로 기병(騎兵) 운용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던 듯하다.
[의의와 평가]
음리화정의 설치와 운용 과정은 신라의 백제 정벌과 삼국 통일, 나당 전쟁에 이르기까지 사벌주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과 신라의 병력 운용 전략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또한 고선사 서당화상비에 등장하는 음리화 삼천당주의 역할은 통일 신라 시대 지방에 파견된 무관이 중앙의 정치·문화·종교 활동에 긴밀하게 개입하였음을 방증하는 자료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