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6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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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起龍 遺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경천로 684[삼덕리 산86]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은영 |
문화유산 지정 일시 | 1980년 8월 23일 - 정기룡 유물 보물 제669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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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정기룡 유물 보물로 변경 지정 |
현 소장처 | 상주박물관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경천로 684[삼덕리 산86] |
성격 | 유물 |
크기(높이,길이,너비) | 길이 157㎝, 너비 4.5㎝[옥대]|가로 64㎝, 세로 55㎝[신패]|가로 91㎝, 세로 26㎝[유서]|가로 52㎝, 세록 170㎝[1617년 교서]|가로 80㎝, 세로 300㎝[1629년 교서]|가로 63㎝, 세로 94㎝[교지] |
관리자 | 상주박물관 |
문화유산 지정 번호 | 보물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삼덕리 상주박물관에 있는 정기룡 장군의 조선 후기 유물들.
[개설]
정기룡 유물(鄭起龍 遺物)은 임진왜란 때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 활약하여 공을 세운 매헌 정기룡(鄭起龍)[1562~1622]과 관련된 유물이다. 옥대(玉帶), 신패(信牌), 유서(諭書), 교서(敎書), 교지(敎旨) 등이 포함되어 있다. 상주박물관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정기룡 유물은 1980년 8월 23일 보물 제66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보물로 변경되었다.
[형태]
정기룡 유물은 교지를 비롯하여 옥대와 신패 등 모두 5종 6점이다.
옥대는 옥으로 만든 허리띠로, 투각된 문양이 있다. 길이 157㎝, 너비 4.5㎝로 화문 장식이 있으며, 전면의 걸이 장식 부분은 일부 훼손된 상태이다.
신패(信牌)는 1598년 4월에 중국 명나라 도독 마귀(麻貴)가 발행한 것이다. 크기는 가로 64㎝, 세로 55㎝이다.
유서(諭書)는 1617년 3월 7일에 정기룡에 내린 것으로 총 1장이다. 크기는 가로 91㎝, 세로 26㎝이다. 내용은 “유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정기룡 만력 45년 3월 초7일(諭 三道統制使 兼 慶尙右道水軍節度使 鄭起龍 萬曆 四十五年 三月 初七日)”이다.
교서는 모두 2장이다. 첫번째 교서는 1617년 3월 7일 발행한 것이으로 크기는 가로 52㎝, 세록 170㎝이다. 내용은 “교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정기룡(敎 三道統制使 兼 慶尙右道水軍節度使 鄭起龍)”이다. 두번째 교서는 1629년 2월 25일 발행한 것이다. 크기는 가로 80㎝, 세로 300㎝로 “교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정기룡(敎 三道統制使 兼 慶尙右道水軍節度使 鄭起龍)”이 표기되어 있다.
교지는 1773년 5월 28일에 정기룡의 시호를 내릴 때 발급된 것이다. 1매로 크기는 가로 63㎝, 세로 94㎝이다. “보국숭록대부행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총관 정기룡 증시 충의공자 건륭 38년 정월 25일(輔國崇祿大夫行知中樞府事 兼 五衛都摠府摠管 鄭起龍 贈諡 忠毅公者 乾隆 三十八年 正月 二十五日)”이라 적혀 있다.
[특징]
정기룡 장군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의 벼슬로 거창 싸움에서 왜적 500여 명을 격파하고, 곤양의 성을 지키는 장이 되어서는 왜적이 호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또 상주판관이 되어 1592년 10월에 경상북도 상주에 도임하여 1592년 11월에 화공(火攻)으로 상주성 탈환의 전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왜대장이 되어 경상남도 고령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사로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경상북도 상주의 충렬사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의’이다. 유물로 옥대, 신패 및 유서, 교서, 교지 등이 있다. 정기룡이 재임 시에 사용하던 물건들과 당시 혹은 사후 발급받은 문서들이다.
[의의와 평가]
정기룡 유물은 조선 시대 인물의 유물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문화유산적 가치가 크다. 옥대와 신패는 정기룡 장군이 임진왜란 때 무신으로 재임하던 당시의 삶을 증명하는 유물이며, 1773년 교지는 정기룡 장군에게 ‘충의’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발급된 교지로서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