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7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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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弘立 |
영어공식명칭 | Kang Hongrip |
이칭/별칭 | 군신(君臣),내촌(耐村),진녕군(晉寧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상주 출신의 문신.
[가계]
강홍립(姜弘立)[1560~1627]의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군신(君臣), 호는 내촌(耐村)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강온(姜溫)이고, 할아버지는 우의정 강사상(姜士尙)이다. 아버지는 좌참찬 강신(姜紳)이고, 어머니는 정유의(鄭惟義)의 딸 동래 정씨(東萊 鄭氏)이다. 부인은 황이형(黃履亨)의 딸 우주 황씨(紆州 黃氏)이고, 아들은 강숙(姜璹)·강원(姜瑗)·강찬(姜瓚)이다. 형은 강홍수(姜弘秀)이고, 동생은 강홍적(姜弘勣)이다.
[활동 사항]
강홍립은 1560년(명종 15) 한성부 난곡[현 서울특별시 관악구 난향동]에서 태어났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97년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에 임명되었다. 1598년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1599년 함경도도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공조전랑·사헌부장령·성균관사예·성균관전적을 역임하였고, 1605년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을 거쳐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강홍립은 명나라 사행을 다녀온 뒤 홍문관부교리·세자시강원보덕·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609년(광해군 원년)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1610년 남병사와 황주부사에 제수되었고, 1611년 수원부사로 부임하였다. 1614년 순검사에 임명되었고, 이후 형조참판·좌참찬·한성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1618년에는 아버지의 공신 작위를 이어 진녕군(晉寧君)에 책봉되었다.
후금(後金)이 명나라 변경을 침입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자 명나라는 후금을 치기 위하여 1618년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조선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병을 보냈으므로 후금을 의식하면서도 출병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홍립은 도원수에 임명되어 부원수인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1만 3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병하였다. 1619년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의 군대와 관전(寬甸) 방면에서 합류하여 동가강(佟佳江)을 따라 회인(懷仁)에서 노성(老城)으로 향하였다. 조·명 연합군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여 앞뒤에서 후금의 군대를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작전에 차질이 생겨 부차(富車)에서 대패하였고, 강홍립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군에 투항하였다. 이는 출정 전에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한 광해군의 밀명에 의한 것이었으나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조정에서는 강홍립의 관직을 박탈하였다.
1620년 조선인 포로들은 석방되어 돌아왔으나, 강홍립과 김경서 등 10여 명은 계속 억류되었다. 강홍립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군과 함께 입국하여 강화에서 화의를 주선한 뒤 국내에 머물다가 1627년 사망하였다.
[묘소]
강홍립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난향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