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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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用中 |
영어공식명칭 | Kwon Yongjung |
이칭/별칭 | 권기수(權己壽),기수(器叟),천연재(天淵齋),활사(活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상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가계]
권용중(權用中)[1552~1598]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기수(器叟), 호는 천연재(天淵齋)·활사(活沙)이다. 초명은 권기수(權己壽)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충순위 권자평(權自平)이고, 할아버지는 참봉 권수화(權秀華)이다. 아버지는 전생서별제 권세기(權世麒)이고, 어머니는 참봉 이기영(李基榮)의 딸 성산 이씨(星山 李氏)이다. 큰아버지 권세린(權世麟)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부인은 주부 황수창(黃守昌)의 딸 평해 황씨(平海 黃氏)이고, 아들은 권덕룡(權德龍)·권흥룡(權興龍)·권어룡(權御龍)·권계룡(權繼龍)이다. 형은 권의중(權義中)이고, 사위는 태충제(太忠濟)이다.
[활동 사항]
권용중은 1552년(명종 7) 상주목 산양현 지동[현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송죽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형 권의중과 함께 이황(李滉)의 문인이었던 친아버지 권세기와 양아버지 권세린의 가르침을 받았고, 20대 이후에는 여러 뛰어난 학자들과 교유하며 학문 연마와 향촌 사회의 교화에도 힘썼다. 권용중은 학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사준원별좌에 천거되었으나 연로한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다가 이후 거듭된 왕명으로 별시위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권용중은 가족을 산양 창구리에 피난시킨 뒤 형 권의중과 함께 산양 일대의 사림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사림들의 추대를 받아 권의중이 대장이 되고, 권용중은 중위(中衛)가 되었다. 산양 의진은 산양과 영순의 왜적을 소탕하였으며, 이후 권의중이 상주 용화사(龍華寺)에서 상주판관 정기룡(鄭起龍), 관병장 김광복(金光復), 외남(外南)의병장 김각(金覺) 등과 함께 상주성을 탈환할 계획을 세웠다. 권용중은 산양 의진 본대를 이끌고 발산(鉢山)[현 상주시 초산동]에서 권의중과 합류한 후 화개봉(花開峯) 아래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을 물리쳐 상주성 탈환에 공을 세웠다.
권용중은 이후 형 권의중과 함께 성산(星山), 죽현(竹峴), 우지령(牛旨嶺),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이동하며 군공을 세웠다. 귀향한 뒤에는 서당을 수리하고 향약을 시행하는 등 전란으로 피폐해진 향촌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계획하였지만 뜻을 이루기도 전에 병을 얻어 1598년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권용중의 저술로는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 활동을 기록한 『용사일록(龍蛇日錄)』이 전한다.
[묘소]
권용중의 묘소는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송죽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권용중은 사망한 뒤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