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8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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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九容[高麗] |
영어공식명칭 | Kim Guyong |
이칭/별칭 | 경지(敬之),백은(伯誾),척약재(惕若齋),육우당(六友堂),김제민(金齊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위은숙 |
[정의]
고려 후기 상주 지역에 거주하였던 문신.
[가계]
김구용(金九容)[1338~1384]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경지(敬之)·백은(伯誾), 호는 척약재(惕若齋)·육우당(六友堂)이다. 초명은 김제민(金齊民)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선(金愃)이고, 할아버지는 김승택(金承澤)이다. 아버지는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이고, 어머니는 여흥군(驪興君) 민사평(閔思平)의 딸 여흥 민씨(驪興 閔氏)이다. 동생은 전교부령 김제안(金齊顔)이고, 아들은 김명선(金明善)·김명리(金明理)·김명윤(金明允)이다.
[활동 사항]
김구용은 1338년(충숙왕 후 7)에 태어나 1355년(공민왕 4)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공민왕이 모란꽃을 시제로 내렸는데, 김구용이 가장 뛰어났으므로 왕이 기특히 여기고 산원(散員)직을 내렸다. 1357년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에 임명되었고, 1367년 민부의랑 겸 성균직강에 제수되어 성리학의 발흥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김구용은 1375년(우왕 1) 삼사좌윤이 되었으며, 반원 친명 정책을 고수하던 공민왕이 사망한 뒤 외교관계 복원을 꾀하던 북원에서 사절을 보내자 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 등의 친명파와 함께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는 외가가 있던 여흥과 상주에 우거하였다.
김구용은 1381년 좌사의대부가 되어 우왕의 잘못된 처사에 대해 경계하는 글을 올렸고, 1382년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판전교시사에 제수되었다.
당시 동북아시아는 원명 교체의 혼란기였다. 의주천호 조계룡(曹桂龍)이 요동에 갔을 때 도지휘 매의(梅義) 등의 말을 곡해하여 조정에 보고하였고, 고려 조정에서는 1384년 김구용을 행례사(行禮使)로 삼아 요동에 보냈다. 요동총병 반경(潘敬)과 섭왕(葉旺)은 사사로이 뇌물을 전하려 하였다며 김구용을 체포하여 당시 수도였던 남경(南京)으로 압송하였다. 이후 김구용은 명 태조의 명으로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되던 중 노주(瀘州) 영녕현(永寧縣)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구용의 저술로는 문집인 『척약재집(惕若齋集)』이 전한다. 『동문선(東文選)』에 김구용의 시 8편이 실려 있다.
[상훈과 추모]
김구용은 사망한 뒤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에 있는 용장서원(龍章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