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8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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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垕 |
영어공식명칭 | Nam Hoo |
이칭/별칭 | 재원(載元),퇴촌(退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644년 - 남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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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62년 - 남후 생원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669년 - 남후 식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71년 - 남후 성균관학유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72년 - 남후 의정부사록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73년 - 남후 대동도찰방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74년 - 병조좌랑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75년 - 남후 무안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78년 - 남후 사헌부장령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79년 - 남후 사간원정언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80년 - 남후 종부시주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80년 - 남후 중화부사 좌천 |
활동 시기/일시 | 1680년 - 남후 탄핵 및 낙향 |
활동 시기/일시 | 1689년 - 남후 사간원정언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90년 - 남후 동부승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90년 7월 - 남후 동래부사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690년 8월 - 남후 사망 |
출생지 | 함창현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
거주|이주지 | 함창현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
부임|활동지 | 무안현 - 전라남도 무안군 |
부임|활동지 | 동래부 - 부산광역시 동래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의령(宜寧) |
대표 관직 | 동부승지 |
[정의]
조선 후기 상주 출신의 문신.
[가계]
남후(南垕)[1644~1690]의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자는 재원(載元), 호는 퇴촌(退村)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현감 남영(南嶸)이고, 할아버지는 현감 남창조(南昌祖)이다. 아버지는 남극로(南極老)이고, 어머니는 도사 이영광(李榮光)의 딸 완산 이씨(完山 李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부사 이숭언(李崇彦)의 딸 경주 이씨(慶州 李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정랑 권덕연(權德衍)의 딸 안동 권씨(安東 權氏)이다. 아들은 남도익(南啚翼)이다.
[활동 사항]
남후는 1644년(인조 22) 경상도 함창현[현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에서 태어났다. 1658년(효종 9) 권황(權愰)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1662년(현종 3)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69년 식년시 문과에 합격하였고, 1671년 성균관학유가 되었다. 1672년 의정부사록이 되었고, 1673년에는 성균관박사·성균관전적을 거쳐 대동도찰방에 제수되었다. 1674년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1675년(숙종 1) 예조좌랑을 역임한 뒤 무안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남후는 1678년 사헌부장령을 거쳐 1679년에는 사간원정언이 되었는데, 이 무렵 남인(南人) 대간으로서 서인(西人) 인사인 송시열(宋時烈)·김만중(金萬重) 등을 탄핵하거나 처벌을 건의하는 데 참여하였다. 1680년 봉상시정·종부시주부·사헌부장령을 지냈으며,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자 중화부사로 좌천되고 서인 대간으로부터 역적 허견(許堅)과 결탁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남후는 고향 함창으로 돌아와 서실을 ‘퇴촌’이라 이름 짓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남후는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자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다. 1690년 사헌부집의와 동부승지를 거쳐 7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 남후는 동래부사로 부임하자마자 왜관(倭館)의 여러 병폐를 해결하고 대기근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였으나, 8월에 왜관으로 가던 중 해운대(海雲臺)에서 갑자기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