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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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大河 |
영어공식명칭 | Nho Daeha |
이칭/별칭 | 수오(受吾),이소당(履素堂),소헌(素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46년 - 노대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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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4년 - 노대하 산공감감역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82년 - 노대하 은진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87년 - 노대하 장례원사의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88년 - 노대하 의성현령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노대하 사복시판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4년 - 노대하 안산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94년 - 노대하 병으로 사직 |
활동 시기/일시 | 1602년 - 노대하 천안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07년 - 노대하 이천도호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09년 - 노대하 사직하고 낙향 |
활동 시기/일시 | 1610년 - 노대하 고부군수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610년 - 노대하 사망 |
출생지 | 한성부 - 서울특별시 |
거주|이주지 | 한성부 - 서울특별시 |
거주|이주지 | 상주목 화령현 - 경상북도 상주시 화동면 |
수학지 | 진도 - 전라남도 진도군 |
부임|활동지 | 은진현 -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
부임|활동지 | 의성현 - 경상북도 의성군 |
부임|활동지 | 고부군 -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일대 |
묘소|단소 | 노대하 묘소 - 경상북도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광주(光州)[광산(光山)] |
대표 관직 | 이천도호부사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노대하(盧大河)[1546~1610]의 본관은 광주(光州)[광산(光山)]이며, 자는 수오(受吾), 호는 이소당(履素堂)·소헌(素軒)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풍저창수 노후(盧珝)이고, 할아버지는 활인서별제 노홍(盧鴻)이다. 아버지는 돈녕부첨정 노극신(盧克愼)고, 어머니는 청주목사 이증영(李曾榮)의 딸 덕산 이씨(德山 李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부제학 신담(申湛)의 딸 고령 신씨(高靈 申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병마절도사 이각(李珏)의 딸 함평 이씨(咸平 李氏)이다. 아들은 노도립(盧道立)·노도일(盧道一)이고, 사위는 허준(許遵)·홍립(洪雴)·이삼근(李三近)이다. 동생은 큰아버지 노수신(盧守愼)의 양자로 입적된 노대해(盧大海)이다.
[활동 사항]
노대하는 1546년(명종 원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1564년(명종 19) 진도에 유배된 큰아버지 노수신을 찾아가 수학하였고, 1574년(선조 7) 음보로 선공감감역에 제수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사헌부감찰 등을 지내고 1582년 은진현감으로 부임하였으며, 1587년 장례원사의가 되었다. 1588년 의성현령으로 부임하였으나 1591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노대하는 1592년 사복시첨정으로 재임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어가(御駕)를 따라 사현(沙峴)에 이르렀으나 왕명으로 노모를 모시고 안협(安峽)으로 피난하였다. 1592년 7월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을 이천에서 만나 보좌하였고, 상의원판관을 거쳐 10월에 세자익위사익위가 되었다. 이후 사복시판관이 되어 무기를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고, 검찰사(檢察使) 김응남(金應南)의 종사관이 되어 의주·용천 지방의 군량 운반을 관장하였다. 1594년 사헌부감찰을 역임하고 안산군수로 부임하였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사직하였다.
노대하는 1597년 청풍과 단양의 수령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602년 종친부전부를 거쳐 천안군수로 부임하였다. 1607년에는 이천도호부사로 부임하여 토적(土賊)을 물리치고 치적을 쌓았지만, 1609년 병으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노대하는 1610년 12월 고부군수로 재임 중 관아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노대하의 묘소는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노대하는 진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이후 둘째 아들 노도일(盧道一)이 영국원종공신에 녹훈되면서 호조판서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