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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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厚載 |
영어공식명칭 | Shin Hujae |
이칭/별칭 | 덕부(德夫),규정(葵亭),서암(恕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상주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신후재(申厚載)[1636~1699]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덕부(德夫), 호는 규정(葵亭)·서암(恕庵)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신여길(申汝吉)이고, 할아버지는 호조정랑 신상철(申尙哲)이다. 아버지는 제천현감 신항구(申恒耉)이고, 어머니는 허한(許僩)의 딸 양천 허씨(陽川 許氏)이다. 부인은 부사 류호연(柳浩然)의 딸 진주 류씨(晉州 柳氏)이고, 아들은 신필현(申弼賢)·신필해(申弼諧)·신필회(申弼誨)이다.
[활동 사항]
신후재는 1636년(인조 14) 상주목 영순면 흥덕[현 경상북도 문경시 점촌동]에서 태어났다. 1660년(현종 1) 진사시에 합격한 뒤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성균관전적·병조좌랑·형조좌랑·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다. 1664년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고, 1668년 5월 통진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병으로 체직되어 1669년 1월 수찬겸한학교수(修撰兼漢學敎授)에 제수되었다. 1672년 부교리·부사직·세자시강원필선·사간원헌납을 거쳐 1673년 예안현감·안동부사로 부임하였다. 1674년 홍문관교리를 거쳐, 1677년(숙종 3) 호군·병조참의·동부승지·좌부승지·우부승지·우승지·여주목사에 제수되었다. 1679년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였고, 1680년 좌부승지로 재임 중 경신대출척으로 남인(南人)이 제거될 때 삭직되었다.
신후재는 1682년 우승지로 복직하였고, 1684년 서원현감을 거쳐 성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환곡을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한 죄로 파직되었다. 1688년 병조참지로 복직하여 곧 병조참의가 되었고,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좌승지·우승지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이후 사은겸진주주청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1690년 예조참판과 강화유수를 지냈다. 1692년에는 한성부우윤과 개성유수를 역임하였고, 1693년 도승지를 거쳐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여주에 유배되었고, 1697년 풀려난 뒤 지금의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에 백련재(白蓮齋)를 짓고 은거하다가 1699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신후재의 저술로는 손자 신사석(申思奭)이 1778년에 간행한 『규정집(葵亭集)』이 있다.
[묘소]
신후재의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우리에 있다. 묘갈명은 이익(李瀷)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