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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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云仡 |
영어공식명칭 | Cho Woonheul |
이칭/별칭 | 석간(石磵),서하옹(棲霞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고려 후기 상주 지역에 은거하였던 문신.
[가계]
조운흘(趙云仡)[1332~1404]의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호는 석간(石磵)·서하옹(棲霞翁)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감찰원장령 조정(趙晶)이고, 할아버지는 헌부산랑 조숙령(趙叔鴒)이다. 아버지는 어사 조건(趙虔)이고, 부인은 김득배(金得培)의 딸 상주 김씨(尙州 金氏)이다. 동생은 조운개(趙云价)·조운식(趙云式)이다.
[활동 사항]
조운흘은 1332년(충숙왕 복위 1) 한양부 풍양현(豊壤縣)[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진접읍·오남읍 일대]에서 태어났다. 이인복(李仁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357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서기가 되었다. 1361년 형부원외랑이 되었고,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을 호종하여 1363년 공신에 녹훈되었다. 1364년 국자감직강이 되었고, 이후 전라도·서해도·양광도의 안렴사를 역임하였다.
조운흘은 1374년 전법총랑을 사직하고 한동안 상주의 노음산(露陰山) 아래에 머물며 「기우도찬(騎牛圖贊)」·「석간가(石磵歌)」 등의 시를 남겼다. 1377년(우왕 3) 좌간의대부로 관직에 복귀하였고, 판전교시사로 있다가 1380년에 사직하고 광주(廣州) 고원강촌(古垣江村)에 은거하였다.
조운흘은 1388년에 다시 전리판서가 되었고, 밀직제학을 거쳐 서해도관찰사로 재임 중에는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후 첨서밀직사사·계림부윤을 역임하였고, 1392년 조선 개국 후에는 강릉부사를 거쳐 검교정당문학에 제수되었다. 조운흘은 1404년(태종 4)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조운흘은 우리나라 시문들을 가려 뽑아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을 간행하였다. 『동문선(東文選)』에는 조운흘의 칠언절구 5수가 수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상주 출신의 문신 노수신(盧守愼)이 노음산과 관련된 조운흘의 행적을 기리고자 「회노음산(懷露陰山)」이라는 시문을 지었다. 이황(李滉)이 함창 공검지(恭儉池)에서 읊은 「노음망운(露陰望雲)」도 조운흘의 행적을 소재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