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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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得沂 |
영어공식명칭 | Chae Deukgi |
이칭/별칭 | 영이(詠而),우담,(雩潭),학정(鶴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채광수 |
출생 시기/일시 | 1605년 - 채득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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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39년 - 채득기 내침의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43년 - 채득기 청나라 심양 파견 |
몰년 시기/일시 | 1646년 - 채득기 사망 |
출생지 | 음성현 삼용리 -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 |
거주|이주지 | 상주목 삼덕리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삼덕리 |
묘소|단소 | 채득기 묘소 -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개곡리 |
성격 | 의관|학자 |
성별 | 남성 |
본관 | 인천(仁川) |
[정의]
조선 후기 상주 지역에 정착한 의관이자 학자.
[가계]
채득기(蔡得沂)[1605~1646]의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자는 영이(詠而), 호는 우담(雩潭)·학정(鶴汀)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채순연(蔡舜年)이고, 할아버지는 채무기(蔡無己)이다. 아버지는 채유종(蔡有終)이고, 어머니는 목사 이귀수(李龜壽)의 딸 고성 이씨(固城 李氏)이다. 부인은 판관 신응연(辛應鍊)의 딸 영산 신씨(靈山 辛氏)이고, 아들은 채극철(蔡克哲)·채극례(蔡克禮)·채극해(蔡克諧)이다.
[활동 사항]
채득기는 1605년(선조 38) 음성현 삼용리[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학문에 매진하던 중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빙고별좌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낙동강 상류 경천대(擎天臺)에 무우정(舞雩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채득기는 이후 명의로 명성을 떨쳐 내침의(內鍼醫)로 인조 등 왕족들을 시봉하였고, 특히 침술에 매우 정통하였다. 인조는 채득기에게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호종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채득기는 질병을 이유로 응하지 않아 보은에 유배되었다. 1643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 심양으로 가서 주치의로 왕자들을 극진히 보필하였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에는 벼슬을 사양하고 상주 삼덕리[현 상주시 사벌국면 삼덕리]에 거주하다가 1646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채득기의 저술로는 의서인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삼의일험방(三意一驗方)』이 있으며, 행적을 엮은 『우담선생문집경천대실기(雩潭先生文集擎天臺實記)』가 전한다.
[묘소]
채득기의 묘소는 상주시 외서면 개곡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채득기는 1830년(순조 30) 사헌부집의에 추증되었다.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 있던 인천 채씨 문중 서원인 웅연서원(熊淵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