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933 |
---|---|
한자 | 河洛 |
영어공식명칭 | Ha Rak |
이칭/별칭 | 도원(道源),환성재(喚醒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조선 전기 상주 지역에 이주하여 정착한 문신.
[가계]
하락(河洛)[1530~1592]의 본관은 진양(晉陽)이며, 자는 도원(道源), 호는 환성재(喚醒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의흥위좌부장 하응천(河應千)이고, 할아버지는 황간현감 하형(河灐)이다. 아버지는 하인서(河麟瑞)이고, 어머니는 사인 조협(趙協)의 딸 풍양 조씨(豊壤 趙氏)이다. 부인은 정충즙(鄭忠楫)의 딸 동래 정씨(東萊 鄭氏)이고, 아들은 하수일(河受一)·하천일(河天一)·하경휘(河鏡輝)이다. 동생은 하항(河沆)이다.
[활동 사항]
하락은 1530년(중종 25) 진주 정곡마을[현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에서 태어났다. 1556년(명종 11) 동생 하항과 함께 조식(曺植)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이후 처가가 있는 상주로 이거하였다. 1568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80년(선조 13) 학행으로 천거되어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光海君)을 가르치는 왕자사부에 제수되었다. 1582년 상주목사 류성룡(柳成龍)의 선정을 기리는 거사비(去思碑)의 비문을 썼다. 1583년 대신소(大伸疏)를 올려 동인(東人)으로부터 공격받고 있던 서인(西人) 인사 이이(李珥)·성혼(成渾)·박순(朴淳)을 변호하였다. 당시 여진족 니탕개(泥湯介)가 변경에서 난을 일으켰는데,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병조판서이던 이이가 왕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병권을 휘둘렀다며 동인들이 이이를 비롯한 서인들을 공격하였다. 하락은 정쟁이 심화되자 상소를 올려 중재하고자 하였으나, 공론을 현혹시키고 배척한다는 이유로 도승지 박근원(朴謹元)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후 하락은 관직에서 물러나 상주로 낙향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음산으로 피난하였으나, 왜군을 만나 막내아들 하경휘(河鏡輝)와 함께 피살되었다.
[학문과 저술]
하락의 저술로는 문집인 『환성재집(喚醒齋集)』 2권 1책이 전한다.
[묘소]
하락의 묘소는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월아리에 있으며, 이경석(李景奭)이 묘갈명을 썼다.
[상훈과 추모]
하락은 1610년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1858년(철종 5)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하대동 산443-1에 있던 도동서원(道東書院)에 배향되었다. 1963년에는 하락의 신도비가 건립되었는데, 신도비명은 송재성(宋在晟)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