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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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炳大 |
영어공식명칭 | No Byung-dae |
이칭/별칭 | 상요(相堯),금포(錦圃),노병직(盧炳稷)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56년 12월 4일 - 노병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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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9년 - 노병대 창릉참봉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95년 - 노병대 향교 향사 폐지 반대 상소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노병대 고종 밀조로 분충정난2등 책록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8월 - 노병대 속리산에서 창의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8월 - 노병대 대전지검 공주지청에서 폭도내란죄로 10년 유형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13년 7월 10일 - 노병대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3월 1일 - 노병대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69년 10월 - 의병대장 금포 노병대선생 기념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2003년 - 노병대 숭렬사에 제향 |
출생지 | 이소리 - 경상북도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 |
묘소 | 탑골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용호리 |
성격 | 의병|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창의대장 |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의병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노병대(盧炳大)[1856~1913]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상요(相堯), 호는 금포(錦圃)이다. 처음 이름은 노병직(盧炳稷)이다. 아버지 노종구(盧宗九), 어머니 의성 김씨(義城 金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노병대는 1856년 12월 4일 경상북도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에서 태어났다. 7세에 글을 읽고 외웠으며, 10세에는 글을 지었다. 1868년 13세 때 서울에 있는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노병대는 1882년 임오군란을 맞아 금오랑(金吾郞) 윤모(尹某)와 함께 무사 8인을 모집하고, 임오군란에 관련된 인물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89년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올랐다. 1895년 10월 향교의 향사를 폐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진사 허운(許運) 등과 함께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국왕의 비답을 받지 못하였다.
노병대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전 판서(判書) 이용원(李容元)을 만나 “지금 국기(國基)가 기울어지고 있는데 밀조(密詔)라도 받을 수 있다면 내 스스로 거사를 하겠다”고 간청하였다. 이에 고종으로부터 “전 참봉 창의 신 노병대에게 선조 계사년의 예에 따라서 분충정난2등(奮忠靖亂二等)을 내리고, 특차비서원비서승(特差秘書院秘書丞)을 특별히 제수한다”는 밀조를 받았다. 노병대는 향리로 돌아와 동지 몇 명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영양의 김도현(金道鉉)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창의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으므로 이강년의진(李康秊義陣)에 좌종사(佐從事)로 일시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노병대는 1907년 8월 경기도 광주군에 사는 전 주사(主事) 임용헌(林容憲), 충청남도 연산군에 사는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 등과 함께 속리산에서 창의하였다. 서울시위대 및 청주진위대의 해산병 200여 명을 규합하여 창의하였는데, 곧바로 서울에서 해산병 수백 명이 추가로 합세하여 군중이 1,000여 명에 이르렀다. 김운로를 맹주로 추대하고, 보은군을 공격한 뒤, 상주 청계사(淸溪寺)로 진영을 옮겼다. 그러나 적병이 급습하여 청주(淸州) 미원(米院)으로 패주하였다.
노병대는 군대를 나누어 호남을 거쳐 성주(星州)에 이르러 적 1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후 충청북도 보은·청주, 경상북도 상주, 경상남도 거창·안의, 전라북도 무주 등지에서 계속 활약하였다. 그러나 우두령(牛頭嶺)에서 크게 패하고 속리산에 돌아왔는데, 남은 군사는 겨우 50명뿐이었다. 노병대는 1908년 음력 6월 15일 보은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1908년 대전지검 공주지청에서 폭도내란죄로 기소되어 10년의 유형(流刑)을 선고받았다. 1910년 국권 침탈 이후 특사로 풀렸으나 “너의 경사인데 왜 나를 석방하느냐”며 항거하다가 강제 출옥되었다.
출옥 후 노병대는 1911년 이강년의병진에 참여하였던 의병 세력과 재기를 위한 군자금 모집을 시작하였다. 1912년 음력 11월 안동 하회동(河回洞)의 참봉 류시일(柳時一)을 총기로 위협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3년 음력 3월 12일 체포되었으며, 1913년 5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913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2년에 처해졌다.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었다. 노병대는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28일 만인 1913년 7월 10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노병대의 묘소는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용호리 탑골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노병대의 공적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9년 10월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남성동 교육연구원에 ‘의병대장 금포 노병대선생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003년 경상북도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에 숭렬사(崇烈祠)를 설립하여 노병대를 제향하였다. 2011년 11월 26일 노병대를 기리는 ‘금포선생 천양 한시대회’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