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004 |
---|---|
한자 | 李起璨 |
영어공식명칭 | Lee Ki-chan |
이칭/별칭 | 경능(敬能),지산(止山),금초(錦樵),금초산인(錦樵山人)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53년 10월 12일 - 이기찬 출생 |
---|---|
수학 시기/일시 | 1861년 - 이기찬 박춘립 문하에서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 이기찬 금천동약 제정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3월 - 이기찬 김산의진 창의대장 추대 |
몰년 시기/일시 | 1908년 1월 13일 - 이기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3년 8월 15일 - 이기찬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청송군 - 경상북도 청송군 |
거주|이주지 | 금산리 -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 |
학교|수학지 | 나호리 - 대구광역시 군위군 우보면 나호리 |
묘소 | 탄현 -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김산의진 창의대장 |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의병.
[가계]
이기찬(李起璨)[1853~1908]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경능(敬能), 호는 지산(止山)·금초(錦樵)·금초산인(錦樵山人)이다. 아들은 이강하(李康夏)·이강은(李康殷)·이강한(李康漢)이다.
[활동 사항]
이기찬은 1853년 10월 12일 경상북도 청송군에서 태어났다. 9세가 되던 1861년 의흥현(義興縣) 나호동(羅湖洞)[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우보면 나호리]으로 이거하여 남서(楠西) 박춘립(朴春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84년 박춘립이 죽은 후 스스로 제자를 양성하였는데, 문하에 큰아들 이강하, 조카 이강주(李康周)를 비롯하여 이해구(李海九)·이의립(李義立)·이성직(李性稙)·나용희(羅容熙) 등을 두었다.
이기찬은 1889년 경상북도 상주군 화서면 금천(錦川)[현 금산리]으로 이거하여 ‘금초산인(錦樵山人)’이라 칭하고 은둔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일어나자 상주 지역의 사족들과 천탁산에 들어가 성을 쌓고 지켰으며, 금천동약(錦川洞約)을 만들어 동학농민군에 대응하였다. 이에 정부에서 소모사(召募使)를 제수하고자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이기찬은 1896년 3월 29일 창의한 김산의진(金山義陣)의 창의장(倡義將)을 맡았다. 구성원들은 대부분 김산을 비롯하여 상주·선산 등지의 유생들이었다. 김산의진은 장날 읍으로 들어가 수백 명의 장병을 모집하고, 김산군 금릉의 무기고를 열어 군비를 확충하였다. 1896년 4월 1일 지례의 관포군을 영입하여 진용을 갖추었으나, 4월 2일 관군이 출동하자 흩어지고 말았다.
1896년 4월 7일 직지사(直指寺)에서 재기한 김산의진은 각처를 전전하며 군량과 군사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4월 17일 경상감영의 관군들이 출동하자 관군이 쏘는 몇 차례의 포격에 괴멸하고 말았다. 4월 22일 무주, 4월 28일 영동을 거쳐 황간에 도착하여 참모회의를 열어, 허위·양제안·조동석 등과 함께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고 유인석과 합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896년 5월 5일 다시 관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허위 등은 진천 방면으로 가고, 이기찬은 양제안·조동석 등과 함께 관군과 접전하였다. 5월 9일 괴산 송면 등지를 경유하여 문경 선유동에 투숙하였다. 5월 13일 김산의진이 상주 하서면 하송에 있는 청계사에 이르자 이기찬은 대장직을 사임하고, 5월 16일 금천의 집으로 돌아왔다. 1897년 충청북도 영동군 문의(文義)로 이사하여 서당을 열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이기찬은 1908년 1월 13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기찬은 문집으로 『지산유고(止山遺稿)』가 있다.
[묘소]
이기찬의 묘소는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 탄현(炭峴)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기찬의 공적을 기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