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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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鶴伊 |
영어공식명칭 | Jang Hak-i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의병.
[가계]
장학이(張鶴伊)[1881~1909]는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다만 판결문에는 경상북도 성주군 출신으로 기재되어 있다.
[활동 사항]
장학이는 1881년경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1906년 7월 1일 일본군과 교전하여 수십 명을 사살하는 등 의성·영천·청송 일원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10월 7일 입암전투(立巖戰鬪) 이후 의병 활동지를 의성으로 옮겼다. 장학이는 1907년 11월부터 박연백의진에서 활동하였다. 이에 앞서 박연백은 을사조약의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켰다. 장학이는 박연백 휘하에서 김반석(金盤石)·이신산(李新山) 등 수십 명과 함께 총기 20여 정을 휴대하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11월 5일 의성군 춘산면 옥정동에 거주하는 이약국(李藥局)에게 군수품으로 목면(木棉) 3필과, 소량동의 민가에서 군자금 45냥을 모금하였다. 1907년 11월 춘산면 언지동과 중리동의 동장으로부터 군자금 10냥을 각각 수집하였다. 장학이는 박연백과 함께 의성군 사곡면 화곡동에서 밀정으로 지목된 김명준(金明俊)을 처단하였다.
1908년 7월에는 이토옥의진(李土玉義陣)에 가담하여, 휘하의 부하 6명과 함께 총기 7정을 휴대하고 청송군 현서면 금수동에서 동민들로부터 식사를 제공받고, 얼마 후 2명의 의병을 보강하였다. 모두 8명이 총기 7정을 휴대하고 의성군 사곡면 산마동 동장 이정효(李貞孝)로부터 마포(麻布) 3필을 군수품으로 수집하였다. 그러나 사곡면 공곡동에서 김서재(金西齋)로부터 목면 1필과 돈 3관문(貫文) 등을 군자금으로 수집하다가 체포되었다.
장학이는 1909년 1월 18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살인 및 강도죄로 교수형을 언도받았다. 3월 6일 대구공소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고, 3월 23일 대심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1909년 5월 11일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장학이의 공적을 기려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