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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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雲植 |
영어공식명칭 | Cho Woon-sik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73년 - 조운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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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조운식 의병 창의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2월 14일 - 조운식 내란죄로 교수형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10년 4월 20일 - 조운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8월 15일 - 조운식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화북면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
성격 | 의병 |
성별 | 남성 |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조운식(趙雲植)[1873~1910]은 1873년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에서 태어났다. 조운식은 1908년 경상북도 및 충청북도 일원에서 독자적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4월 3일 김규환(金奎煥)과 함께 휘하 의병 20여 명을 거느리고 청주군 산외일면 세교(細橋)에서 우편부를 공격하여 현금 3,000원을 군자금으로 획득하였다. 1909년 5월 9일에는 김규환·석성국(石聖國)과 함께 휘하 의병 약 40명을 거느리고 청주군 산외일면 초정동에서 우편물을 호위하는 일본군 기병(騎兵) 2명을 공격하여 선두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현금 2,000원을 군자금으로 모았다.
조운식은 1909년 음력 7월경 경상북도 풍기에서 활동하던 청주 출신의 의병장 한봉서(韓奉西)와 박한성(朴漢成)의 초청을 받고 총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조운식은 스스로 ‘문대장(文大將)’이라 칭하며, 우익장 한동해(韓東海), 좌익장 박한성, 호군장 이인우(李仁禹), 조련장 김용태(金龍泰) 등을 장령으로 임명한 뒤 창의하였다.
조운식은 창의 이후 휘하의 정치옥(鄭致玉)에게 창의 취지를 설명하고 동지를 규합하는 고유문(告諭文)을 작성토록 하였다. 고유문에서 “위로는 군부(君父)의 치욕과 큰 충신들의 원한을 설치(雪恥)한 연후에 죽음에 달한 창생의 생명을 구할 것”이라고 전제한 다음, “소위 면장(面長)은 일본 세력을 빙자하여 인민에게 해를 끼치고 일본의 노예로 삼고자 하니 이는 우리 국민들이 생각하기에 면장의 폐해가 일본인보다 더욱 심하니 이들을 일일이 나포하여 박멸한 후에 그만둘 것이라”고 하였다. 조운식은 고유문을 각처에 배부하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1909년 음력 7월부터 12월경까지 충청북도 보은·청산, 경상북도 상주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운식은 1909년 음력 7월 9일 충청북도 보은군 탄부면 덕동에 사는 면장 이상락(李相洛)의 집을 찾아가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09년 음력 8월경에는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용화리 조동에 사는 남주사(南主事)의 집에서 정화춘(鄭化春)·김경모(金京模) 두 사람을 밀정으로 지목하여 처단하였다. 그리고 1909년 음력 9월 30일 청주군 청천면 면장 진필오(陳必五)와 청주군 산외이면 면장 홍모(洪某), 1909년 음력 10월 11일 보은군 속리면 백현리 심승복(沈承復) 등에게 고유문을 보이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조운식은 1909년 음력 10월 13일 러시아에서 의병 활동을 벌이던 이범진(李範晋)으로부터 국내의 모든 의병이 러시아로 모여 병비(兵備)를 정리한 후, 1910년 3월을 기하여 일시에 항거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이에 한봉서·박한성·이인우·김용태 등 부장 4명과 부하 350여 명을 이범진에게 파견한 뒤, 각처의 양반 및 유력한 인사를 의병으로 모집하여 1910년 3월 이범진과 만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09년 음력 10월 15일 의병을 모집하던 중 박치량(朴致良)·이자성(李子成)과 함께 충청북도 영동경찰서 순사에게 체포되었다.
조운식은 1910년 2월 14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다. 그러나 1910년 3월 12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어 4월 20일 경성감옥에서 사형 집행되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조운식의 공적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