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0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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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千世憲 |
영어공식명칭 | Cheon Seheon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천세헌(千世憲)[1879~1945]의 본관은 형양(潁陽)이다. 아버지는 천병우(千秉祐)이고, 어머니는 영월 엄씨(寧越 嚴氏)이다.
[활동 사항]
천세헌은 1879년 5월 17일 상주목 산양현[현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에서 태어났다. 1885년부터 1901년까지 선산(善山)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02년 상경하여 외국어학교 일어과에 입학하였다. 1903년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모집에 지원하여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하와이 이주 후 약 3년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였으며, 1907년부터는 뉴욕으로 이주하여 요리 및 식물 상점을 경영하는 등 상업에 종사하였다.
천세헌은 1910년경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지방총회 뉴욕지회에 가입하여 조국의 독립운동과 한인 교포들의 민족 교육 실시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1914년 안창호(安昌浩)·송종익(宋鍾翊) 등 8명이 창립한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17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방총회장으로 선임되어 대한인국민회에 가옥채보상금(家屋債補償金)을 출연하였다.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한 한인자유대회에 참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와 후원, 승인 요구, 외교사무소 설치 등을 결의하였다.
천세헌은 1922년 대한민족대표단(大韓民族代表團)의 일원으로 중국 상하이로 파견되어 4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국민대표회를 지원하여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7월에는 안창호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고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온 천세헌은 1923년부터 17년 동안 시카고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며 한인 동포들의 생활과 자치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1939년 10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최능익(崔能翊) 등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소장파들이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직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후원할 목적으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를 조직하자, 1940년 7월 강영승(康永昇)과 함께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시카고지방의회를 설립하고 서기대표로 활동하면서 중국 군대 후방 공작을 협조하였다.
천세헌은 1940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고, 1942년 미주 한인의 대일전 참전 문제를 협의하기 바란다는 서재필(徐載弼)의 서신을 받고 미국 군사정보부와 협의하였다. 1942년부터는 각종 기금을 출연하여 조국의 독립 전쟁을 적극 후원하였다. 천세헌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45년 6월 14일 사망하였다.
[묘소]
천세헌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로 210[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천세헌의 공적을 기려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