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4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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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啓熙 |
영어공식명칭 | Hwang Gye-hui |
이칭/별칭 | 경초(景初),심기당(審幾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순한 |
출생 시기/일시 | 1727년 - 황계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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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77년 - 황계희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780년 - 황계희 옥동서원 원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781년 - 황계희 옥동서원 원장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785년 - 황계희 사망 |
출생지 | 경상도 상주목 - 경상북도 상주시 |
묘소|단소 | 소정리 - 경상북도 상주시 모서면 소정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성 |
본관 | 장수(長水) |
대표 관직|경력 | 옥동서원 원장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학자.
[가계]
황계희(黃啓熙)[1727~1785]의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자는 경초(景初), 호는 심기당(審幾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황종량(黃鍾亮), 할아버지는 황연(黃沇), 아버지는 황도중(黃道重)이다. 어머니는 이만헌(李萬憲)의 딸 연안 이씨(延安 李氏)이다.
[활동 사항]
황계희는 1727년(영조 3)에 경상도 상주목[현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태어나 상주 모동에 거주하였다. 1734년 아버지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사면되어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한 달 동안, 밤낮으로 울부짖으면서 주변 아이들과 놀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바람으로 과거 공부에 힘썼으나 1766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황계희는 삼년상을 마친 뒤 과거 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렇지만 큰형의 간절한 권유로 과거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1777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황계희는 1780년과 1781년에 옥동서원(玉洞書院) 원장을 역임하였다. 원장 재임 때에 거재(居齋)와 강학 장소를 마련하여 후학들이 수시로 익힐 과목을 정하여 강론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또한 향음주례를 익히고 실천하는 등 고을의 풍속 교화에 힘썼다.
[학문과 저술]
황계희는 어린 시절부터 『십팔사략(十八史略)』을 수십 번 읽는 등 총명함이 뛰어났으며, 경전뿐만 아니라 패사(稗史), 소설(小說)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황계희는 결혼 후에는 대산 이상정(李象靖)[1711~1781]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이상정은 『대학장구(大學章句)』와 『성학십도(聖學十圖)』, 「옥산강의(玉山講義)」 등을 황계희와 함께 강론하며 연구에 매진하였고, 마침내 이상정은 자신의 학문을 황계희에게 전수하였다. 저서로는 『심기당집(審幾堂集)』 4권 2책이 전한다.
황계희는 1785년 사망하였다.
[묘소]
황계희의 묘소는 경상북도 상주시 모서면 소정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