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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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戊申亂 |
영어공식명칭 | The Mooshin Revolt |
이칭/별칭 | 이인좌의 난,정희량의 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1728년 이인좌와 정희량이 일으킨 난 당시의 상주 지역 동향.
[개설]
무신란(戊申亂)은 1728년(영조 4) 무신년에 일어난 반란이다. 충청도에서는 이인좌(李麟佐)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 영남에서는 정희량(鄭希亮)이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정희량의 난이라고도 한다. 당시 상주에서는 일부 인사들이 가담하여 처벌을 받았으며, 한편으로는 의병을 일으켜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 일조하였다.
[역사적 배경]
숙종 연간 소론은 세자인 경종을 지지하였지만, 노론은 연잉군(延礽君)[훗날 영조]을 지지하며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였다. 이후 경종이 즉위하자 소론 강경파들은 신임옥사(辛壬獄事)를 일으켜 노론 대신들을 제거하였다. 하지만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정국은 급변하게 된다. 영조 즉위 후 노론 세력들은 신임사화를 문제 삼기 시작하였고, 반대로 소론의 입지는 약화되어 갔다. 이에 이인좌를 비롯하여 박필현(朴弼顯)·이유익(李有翼)·심유현(沈維賢) 등 소론 강경파는 영조의 왕위 계승권을 부정하며, 무신란을 일으키고 소현세자의 증손자 밀풍군(密豊君)을 추대하였다.
무신란에서 주목할 점은 소론 세력뿐만 아니라, 숙종 연간 이후 정계에서 소외된 일부 남인 세력도 가담하였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무신란을 주동한 정희량은 정온(鄭蘊)의 후손으로 경상도 안음[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지역에 세거하던 남인 명문가 출신이다. 그런 가운데 정온의 4대손이자 정희량의 아버지인 정중원(鄭重元)이 경상도 안음에서 순흥도호부로 이주하게 되면서, 무신란 직전 정희량은 영주 지역과도 연고를 가지게 되었다.
[경과]
1728년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하면서 무신란이 시작되었다. 무신란 직전 순흥도호부에 이거하여 있던 정희량은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좌도의 남인들을 적극 포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남인들의 소극적 태도로 인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경상우도의 인사들을 규합하여 1728년 3월 20일 거병한 후 안음 일대를 점령하고, 1728년 4월 3일까지 거창·합천·함양 등을 점령하였다. 당시 상주에서 정희량 무리와 접촉한 자들은 박필현·박사제(朴師濟) 부자, 김홍수(金弘壽), 한세홍(韓世弘) 형제 등으로 확인된다. 영남 안무사 박사수(朴師洙)는 영남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종성부사 황익재(黃翼再)를 소모사(召募使)로 차출하고, 안동에 이르러 정희량 등이 접촉한 인사들을 압송하는 한편 문경의 신필정, 상주의 전 부솔(副率) 성이홍(成爾鴻), 영천의 정규양(鄭葵陽)에게 사민들을 인도하여 창의하도록 하였다. 또한 소모사 황익재(黃翼再)를 상주로 보내 사민을 타일러 경계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상주에는 전직 관원과 유생이 상주향교에 모여 창의를 논의하고, 4월 4일 향사당에 모여서 의병진을 구성하였다. 당시 의병장에는 전군수 손경석(孫景錫), 중군에는 생원 이인지(李麟至), 참모에는 정자 황침(黃沈)·진사 성덕징(成德徵)·유학 강석필(姜碩弼), 소모관에는 부솔 성이홍(成爾鴻)·진사 이증엽(李增曄)·정자 김집·강항(姜杭)·권한(權澣) 등이 선발되었다. 그러나 상주의 의병진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에 반군은 거의 궤멸하였다.
[결과]
영조는 오명항(吳命恒)을 사로도순무사, 박찬신(朴纘新)을 도순무중군, 박문수(朴文秀)를 종사관으로 각각 임명하여 무신란을 진압하게 하였다. 이에 관군은 1728년 3월 24일 안성과 죽산을 회복하고 이인좌 등을 생포하였다. 정희량의 부대도 역시 관군에 의하여 패배하였고, 결국 거창에서 선산부사 박필건(朴弼建)과 곤양군수 우하형(禹夏亨) 등에게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난에 가담한 상주의 박필현 부자와 한세홍 형제, 김홍수 역시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무신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순흥·영주·풍기·상주·안동 등지의 사림들은 적극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난이 진압된 이후 영조는 영남을 역향으로 지목하여, 영남 인사들의 출사는 더욱 제한되었다. 그리하여 영남 인사들은 더욱 향촌 사회에 관심을 갖고 주민들을 교화하면서 지배력을 강화하여 나갔다.
[의의와 평가]
무신란 이후 상주 지역 서인계는 더욱 활발히 활동하며 향촌 사회의 지배력을 키워 나갔다. 반면 남인계는 수령의 견제와 노론 세력과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남노 간의 분립이 더욱 고착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