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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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烽燧 |
영어공식명칭 | Beacon Fir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 있던 불과 연기를 이용한 조선 시대 군사 통신 시설.
[개설]
봉수(烽燧)는 전통 시대에 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외적의 침입과 같은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통신 시설이다. 낮에 연기를 올리기에 ‘봉(烽)’, 밤에 횃불을 통하여 통신하기에 ‘수(燧)’라고 한다. 각 봉수의 거리는 수십 리에 이르며, 봉수대는 산 정상에 설치되었다. 경상북도 상주 지역은 총 6곳에 봉수가 설치되었다.
[조선 시대 봉수 제도]
우리나라 봉수의 기원은 삼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제도로 정비된 것은 고려 시대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서 세종은 고려의 봉수제를 계승하고 당의 제도를 참작하여 새로 봉수 규칙을 정하였다. 이에 따라 평상시에는 1거(炬), 적이 나타나면 2거, 경계에 접근하면 3거, 경계를 침범하면 4거, 접전하면 5거를 올리도록 하였다. 봉화대의 군사적 중요도에 따라 봉수군의 배치가 달랐다. 서울 목멱산[현재 남산] 봉화대를 중심으로 다섯 방면의 봉수로를 정비하였는데 1로가 함경도·강원도 방면, 2로가 경상도 방면, 3로가 평안도 방면의 육로, 4로가 평안도·황해도 방면의 해로, 5로가 충청도·전라도로 연결되는 봉수로였다. 조선 초기에 확립된 봉수 제도는 점차 해이해졌으며, 임진왜란을 앞두고 정부가 대대적으로 정비하였지만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이후 파발제(擺撥制)가 봉수제를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봉수제는 이후 정비와 폐지를 거듭하다가 1894년(고종 31) 근대적인 통신 체제로 전환함에 따라 폐지 수순을 밟았다.
[상주의 봉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조선 전기 상주의 봉수는 공성현(功城縣) 회룡산(回龍山), 청리현(靑理縣) 서산(西山), 청리현 소산(所山), 중모현(中牟縣) 소산(所山), 화령현(化寧縣) 국사당산(國師堂山), 산양현(山陽縣) 소산(所山) 등 6곳이 있었다.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남쪽의 김산군(金山郡) 소산(所山)의 연락을 공성현 회룡산에서 받아 동쪽의 청리현 서산에 알렸다. 두 곳은 약 25리[약 9.8㎞] 정도 떨어져 있었다. 서산에서는 북쪽으로 35리[13.7㎞] 떨어진 청리현 소산에 전달하였으며 다시 35리 떨어진 북쪽의 함창현 남산에 알렸다. 중모현 서쪽에 있는 소산 봉수는 남쪽의 충청도 황간현 소산에 응하여 서쪽으로 화령현 국사당산 봉수에 전달하면 보은현 금적산 봉수에서 받았다. 산양현 소산 봉수는 현의 동쪽에 있었다. 그래서 동쪽의 용궁현 용비산(龍飛山) 봉수에 응하거나, 서쪽의 문경 호계현 선암산(禪巖山) 봉수에 응하여 동서로 소식을 전하였다. 이처럼 상주 지역 봉수 체계는 크게 세 방향으로 전달되었다. 김천-상주-함창-문경으로 연결되는 선과 황간-중모-화령-보은으로 연결되는 선, 안동-예천-용궁-산양-호계-문경으로 연결되는 선이다. 상주 지역이 교통으로 요충지로서 경상도와 충청도의 관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32년(순조 32) 간행된 『상산읍지(商山邑誌)』,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1895년(고종 32) 『영남읍지(嶺南邑誌)』에는 중모현, 화령현, 산양현 봉수는 사라진 것으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