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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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The Rebellion of Wonjong and Ann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방용철 |
[정의]
889년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개설]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난은 889년(진성여왕 3) 신라에서 반복되는 왕위 계승 분쟁과 권력 쟁탈전으로 국가적 기반이 약화되는 가운데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일원인 사벌주(沙伐州)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이다.
[역사적 배경]
8세기 후반 무렵부터 계속된 왕위 계승전과 진골 귀족 세력의 반역, 빈번해진 자연재해 등으로 신라의 국력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여러 왕은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고, 사면령을 내리는 등 나름대로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으나 중앙 정치의 불안으로 효과는 크지 않았다. 국가의 기반이 약해진 시기에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定康王)의 동생으로 왕위를 이은 진성여왕은 정국을 수습할 정치적 역량이나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였다. 아버지 경문왕(景文王) 재위 때부터 헌강왕·정강왕 대까지는 진골 귀족들이 끊임없이 모반하였다. 정강왕은 1년 남짓[재위 886~887] 왕위에 있다가 병사하였던 만큼 국왕의 권위가 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진성여왕이 즉위하였다.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느낀 진성여왕은 즉위 직후부터 대사면을 실시하고, 1년간 주군(州郡)의 조세를 면하여 주었으며, 황룡사에 몸소 행차하여 백고좌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다만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거나 일식·가뭄 등의 기상이변이 잦아졌고, 숙부인 위홍(魏弘)과의 간통 및 미소년들과의 음란한 행위 등 부정적인 측면들이 없지 않았다. 국왕의 정치를 비방하는 글들이 횡행한 사례들을 고려할 때 진성여왕의 권위는 일찍이 추락하였다고 보인다. 889년 전국의 주군이 공물과 세금을 납부하지 않아 국고가 바닥나면서, 국가의 존립 기반이 매우 위태로워졌다. 이에 진성여왕은 왕명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공물과 세금 납부를 독촉하였는데, 폐단이 극심하였던지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상주 지역은 낙동강에서 비롯된 충적 평야와 소백산맥 일대의 삼림 자원을 기반으로 하여 영남 최대의 농업 생산력을 보유한 곡창 지대로 이름 높았다. 게다가 당시의 사벌주는 10개 군(郡)과 30개 현(縣)을 관장하는 광역 행정 구역이었던 탓에, 조세 수취를 강화하려는 신라 정부의 압박이 가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889년 가장 대표적인 농민 반란인 원종과 애노의 반란이 상주를 중심으로 발발하였다.
[경과]
원종과 애노의 난은 단순한 농민 항쟁으로 평가하기 힘든 규모로 발전하였다. 진성여왕은 나마(奈麻) 영기(令奇)를 파견하여 원종과 애노를 사로잡아 오라고 명하였다. 하지만 사벌주에 도착한 영기는 반란군의 진용과 방어 시설 등을 살펴보고는 두려워하여 제대로 나아가지도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사벌주 지역의 촌주(村主) 우련(祐連)이 홀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신라 정부는 영기를 참수하고, 10여 세에 불과한 우련의 아들을 촌주에 임명하여 본보기로 삼게 하였다.
[결과]
원종과 애노의 난이 어떻게 수습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891년 10월 강원도 원주 일대를 장악한 양길(梁吉) 세력이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 미루어, 사벌주의 봉기도 쉽게 진압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의의와 평가]
원종과 애노의 난은 신라 정부의 공납 독촉에 따른 대규모 농민 봉기를 대표하는 사건이자 신라 후기 국가의 체제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군사 지휘관이 신라의 지방 지배 거점이었던 사벌주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였다는 것은 중앙 정부의 무능이 잘 드러나는 사례인 동시에, 지방 세력이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하였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