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0526
한자 壬辰倭亂
영어공식명칭 The Lmjin War|Japanese Invasions of Korea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5월 23일연표보기 - 임진왜란 발발
종결 시기/일시 1598년 12월 16일연표보기 - 임진왜란 종결
성격 전쟁|사건
관련 인물/단체 정기룡|김일|정경세|김홍민|김각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경상북도 상주 지역을 비롯하여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일본과의 전쟁.

[개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상주와 함창에서는 많은 인사가 창의(倡義)하여 왜군을 방어하고, 정기룡을 중심으로 한 관군과 합세하여 상주성을 수복하고, 당교전투에도 참여하였다.

[역사적 배경]

조선은 건국 이후 사회 안정이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16세 중반 이후 왜구의 침입이 증가하고, 정치적·사회적으로 많은 모순이 배태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4대 사화와 훈구·사림 세력 간 정쟁으로 정상적인 정치 운영이 어려웠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전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일례로 조선 전기 경상도 군사 체제는 김해, 대구, 상주, 경주, 안동, 진주 등 6개의 진관을 두었다. 그러나 16세기 이래 방군수포(放軍收布)와 대립(代立)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면서, 정부는 진관별 자전자수(自戰自守) 원칙을 포기하고 가용 병력을 총동원하는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로 방어 전략을 수정하였다.

한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명과 조선을 포함하는 대륙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마도주(對馬島主)를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어 조선과 동맹을 체결하여 같이 명을 치자고 제안하였다. 1590년 조선 정부는 일본의 사정을 파악하고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1591년 봄 국왕 선조에게 복명하는 자리에서, 서인인 정사 황윤길(黃允吉)은 도요토미가 조선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동인인 부사 김성일(金誠一)은 침공 가능성을 부인하였다. 두 통신사의 엇갈린 주장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는 1591년 여름부터 일본군의 주요 예상 침공로에 대대적으로 축성(築城)하고, 군인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확충하는 등 전쟁 대비 태세에 돌입하였다.

[경과]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은 부대를 3군으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제1군은 4월 14일 동래를 거쳐 밀양·청도·대구·상주를 거쳐 조령을 넘는 중로(中路), 제2군은 경주·영천·안동을 거쳐 조령을 넘는 동로(東路), 제3군은 김해 죽도(竹島)로 상륙한 후 제4군과 합류하여 창원·함안·창녕·김천을 거쳐 추풍령을 넘는 서로(西路)로 진격하였다. 상주·함창 지역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군의 진격로에 있었다. 4월 14일 동래성을 함락한 제1군은 동래·양산 등을 거쳐 4월 18일에는 밀양을 함락하고, 20일에는 대구를 점령하였다.

상주에서는 4월 14일 왜군의 침공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관군 동원령을 하달하였다. 상주와 함창의 관군은 상주목사 김해(金澥), 함창현감 이국필(李國弼), 솔영장 김준신(金俊臣) 등의 지휘 아래 대구를 향하여 나아갔지만, 칠곡 석전(石田)에서 피난민들을 왜적으로 오인하여 붕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4월 23일 순변사 이일(李鎰)이 상주에 도착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모집하였다. 4월 25일 아침에 북천에 진을 쳤던 조선군은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순변사 이일과 충청방어사 변기는 급히 도주하였지만, 종사관 윤섬, 박호, 이경류, 상주 판관 권길, 사근도 찰방 김종무 등은 전사하였다. 상주를 점령한 고니시 부대는 일부를 주둔시키고 북상하여 4월 28일 충주에서 도순변사 신립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후 파죽지세로 5월 2일 수도 한양을 무혈입성하였다. 그 후 왜군들은 각 장수들로 하여금 도별로 점령지를 분할하여 관할하도록 하였다.

이에 경상도는 제7군(軍)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모리 데루모토 휘하 장수들이 점거하고 통치하였다. 특히 낙동강과 영남대로는 왜군들의 보급로로서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에 왜군들은 상주, 선산, 대구, 밀양, 동래 등지에 군대를 집중적으로 배치하였다. 전란 초기 조선의 관군은 왜군의 침공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실제로 1592년 5월 선전관(宣傳官) 민종신(閔宗信)의 보고에 따르면, 전란 초기 접전이 벌어진 곳은 김해·상주·밀양·충주뿐이었으며, 당시 재직하던 수령 67인 가운데 25인 가량이 도주하였다. 그로 인하여 백성들의 관에 대한 불신이 폭주하고 일부 백성들은 약탈과 보복을 일삼거나 왜군에 동조하여 부왜자(附倭者)가 되었다.

상주는 장기전을 대비한 중간 전략지와 군량미 확보의 거점이었다. 이에 왜군은 상주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당교(唐橋)와 영순 등지에도 가옥(假屋)를 건립한 후 주변의 용궁·예천·장천·김산·가은 지역을 약탈하였다. 이처럼 상주는 왜군의 직접적인 침략과 계속적인 주둔으로 사족을 위시한 대부분의 백성이 소백산맥을 비롯한 산간 지대로 피난하였다. 그래서 의병 조직에 필요한 인적·물적 기반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상주에서는 초유사 김성일의 창의 격문과 선조의 교서, 그리고 각지의 의병들의 활동에 힘입어 7월 하순에 이르러 의병이 결성되었다. 7월 30일 처음 창의한 의병 부대인 창의군(倡義軍)은 이봉(李逢)을 주장으로 함창과 상주의 인사들이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노대하(盧大河)·임창원(任昌遠)·조익(趙翊) 등이 8월 중순 창의하여 김홍민(金弘敏)을 대장으로 충보군(忠報軍)을 조직하였다. 9월 중순에는 정경세·이전·이준 등이 창의하여 김각(金覺)을 대장으로 상의군(尙義軍)을 조직하여 외남(外南)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김각 등의 활동은 당교와 상주성에 주둔한 왜군에 직접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1592년 10월 정기룡(鄭起龍)이 상주 가판관(假判官)으로 부임하여 관군의 재정비가 이뤄지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의병들은 10월부터 당교와 함창, 화령 등지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이고 정기룡의 관군과 합세하여 11월 23일에는 상주성을 탈환하였다. 12월에는 경상도 각 군현의 관군과 의병들과 연합하여 당교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1593년 1월 초순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것을 계기로, 각지의 의병 부대는 지역의 관군으로 편입되었다. 상주의 의병들은 이후 상주목사 정기룡의 지휘를 받았다. 이후 의병들은 남하하는 명군의 군량미 운송 업무를 맡았다. 당시 명군에 대한 군량 지원 문제는 민간에 엄청난 부담을 주었으며, 의병 부대가 해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결과]

1598년 11월 노량해전(露梁海戰)을 끝으로 7년간의 임진왜란은 막을 내렸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는 왜군의 진격로에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극심하였지만, 왜군에 맞서 많은 의병이 일어난 지역이었다. 상주 지역은 왜군이 주둔한 지역으로서 피해가 컸지만, 사족들의 주도로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왜군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상주·함창 지역의 의병장 대부분은 세거(世居)하며 재지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사족이었다. 사족들의 의병 활동은 전란 이후 재지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한편, 사족들은 전황의 추이에 따라 능동적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주 의병들은 다른 군현의 의병 부대와도 연결하여 제휴하는 한편 관군 세력과도 제휴하여 연합 전선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상주 의병들이 활동한 지역은 상주뿐만 아니라 함창, 선산, 개령, 충청도 보은 일대까지 확대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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