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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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 時代 |
영어공식명칭 | The Joseon Dynasty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1392년에서 1863년까지 경상북도 상주 지역의 역사.
[개설]
현재의 상주시는 조선 시대 상주목(尙州牧)과 함창현(咸昌縣)으로 나뉘어 있었다. 상주목은 신라 시대부터 행정·군사·경제의 중심지인 거읍(巨邑)이었다. 실제 조선 초기에는 계수관으로서 7개의 속현과 12개의 군현을 관장하였다. 또한 1408년(태종 8)부터 임진왜란까지 경상감영이 설치된 행정의 중심지였다. 함창은 현(縣)으로서의 읍격을 유지하였다. 진관체제가 시행된 후 광역주로서 상주의 역할은 사라졌지만 조선 후기까지 상주진관(尙州鎭管)에는 진영장(鎭營將)을 두고 12개 군현의 지방군을 관장하였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조선 후기에는 진영장이 토포사(討捕使)도 겸직하면서 권한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외에도 충청도로 이동하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각종 세곡과 진공 및 물자, 인물들이 모였으며, 1만 5000결 이상의 농지를 가진 거읍이었다.
상주의 토성은 읍세에 비하여 번성하지 못한 편이었다. 결과적으로 토성사족들이 열세인 반면 16세기 이래로 처향, 외가를 연고로 타읍에서 이주한 사족들이 증가하였다. 이런 가문들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창의(倡義)하고 꾸준히 사환(仕宦)하면서 재지사족으로서 상주 지역을 영도하게 되었다. 이런 가문들은 읍치 주변의 농지를 개간하고 관개(灌漑) 시설을 넓히면서 재지적 기반을 넓혀 나갔다. 19세기 초반 확인되는 50개의 제언은 그런 활동의 결과였다. 이외에도 11개의 서원과 1개의 사우, 1개의 단을 건립한 것은 그만큼 재지사족이 번성하였음을 의미한다. 학문적으로는 충청도와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송시열로 대표되는 호서학과 안동 지역의 퇴계학의 영향을 고르게 받았다. 결과적으로 향내에는 남인 계열의 인사들뿐만 아니라 서인 내지 노론 계열의 인사들도 많았으며 영남 지역 서인 계열 확산의 본거지로서 자리하였다.
함창현의 경우 읍세가 작아서 인접한 상주목의 관할에 있었다. 함창도 토성사족보다 타읍 출신의 사족들이 많았다. 특히 15세기에 사림파의 이주가 많았으며 이후 낙향, 처향, 외가 등을 통하여 계속 증가하였다. 상주에 비하여 읍격, 경제, 사회, 인물은 열세였지만 정치·사상적 측면에서 상주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행정 구획의 개편]
조선 전기 상주목에는 청리현(靑理縣), 화령현(化寧縣), 중모현(中牟縣), 단밀현(丹密縣), 산양현(山陽縣), 공성현(功城縣), 영순현(永順縣)의 7개 속현과 장천부곡(長川部曲)·연산부곡(連山部曲)·무림부곡(茂林部曲)·평안부곡(平安部曲)의 4개 부곡이 있었다. 관할[所領]은 성주목, 선산도호부, 합천군(陜川郡)·초계군(草溪郡)·금산군(金山郡), 고령현(高靈縣)·개령현(開寧縣)·함창현(咸昌縣)·용궁현(龍宮縣)·문경현(聞慶縣)·군위현(軍威縣)·지례현(知禮縣)이다. 그러나 1456년(세조 2) 군현의 병합사목(竝合事目)이 시행되면서 화령현, 중모현, 단밀현, 산양현, 장천부곡 등만 확인된다. 관할하던 군현들은 진관체제의 시행으로 여전히 상주진(尙州鎭)에 속하였지만 상주목사가 아닌 진영장(鎭營將)의 통제를 받았다. 이러한 군사 행정 조직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한편 18세기 상주목의 면리는 자료마다 편차가 있지만 대체로 면리화가 완료되었다. 즉 내동면, 내남면, 내서면, 내북면, 외동면, 외남면, 외서면, 외북면, 중동면, 단북면, 단동면, 단서면, 단남면, 장천면, 청동면, 청남면, 공동면, 공서면, 모동면, 모서면, 화동면, 화서면, 화북면, 은척면, 영순면, 산남면, 산서면, 산동면, 산북면 등으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은척면은 은척소가, 장천면은 장천부곡이, 영순면은 영순현이 직촌화한 경우이다. 함창현은 별도의 속현과 부곡은 없으나 월경처(越境處)로 상주 임내 은척소(銀尺所)와 영순현(永順縣)이 있었다.
상주목에는 1408년(태종 8)부터 1593년(선조 26)까지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행정의 중심지로 자리하였다. 바로 신라와 고려를 지나면서 행정·군사·경제의 거점으로 꾸준히 성장하여 온 결과였고, 국왕이 있는 한양과 가깝고 모든 세곡의 집결처이자 통로였기 때문이다. 감영이 대구로 이전한 후에도 상주는 행정력은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교통·군사·경제의 거점으로 존재하였다.
[상주 지역 경제적 기반 변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보면 상주목의 호수와 인구는 1,845호, 3,132명이며, 청리(靑理)는 54호, 307명, 화령(化寧)은 129호, 557명, 중모(中牟)는 109호, 150명, 단밀(丹密)은 140호, 700명, 산양(山陽)은 112호, 667명, 공성(功城)은 110호, 630명, 영순(永順)은 22호, 132명이다. 모두 합하여 2,521호, 6,275명이다. 남정(男丁)만을 대상으로 한 인구이므로 실제 인구는 1호당 4인으로 추정한다면 약 2만 5000명 정도이다. 그러나 1832년(순조 32) 간행된 『상산읍지(商山邑誌)』에는 1만 8507호에 7만 110가구가 확인된다. 이 가운데 남자는 2만 9994구, 여자는 3만 9740구이다. 그러나 1862년 『상주목읍지』에는 원호 1만 7877호, 인구 6만 5035구이며, 남자는 3만 624구, 여자 3만 4411구가 확인된다.
실제 상주의 농지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5세기 초반 간전(墾田)이 1만 5360결이며, 이 가운데 논이 약 6,144결이었다. 그런데 1832년(순조 32) 『경상도읍지』에는 한전(旱田)[밭]은 8,847결 72부 5속, 수전(水田)[논]은 6,641결 30부로 확인된다. 모두 1만 5489결 2부 5속으로 300년 전에 비하여 소폭 증가하고 밭의 비중이 컸다. 그러나 이것은 장부상의 기록이며 실제 농사를 짓는 기전(起田)은 밭 2,239결 3부 7속, 논 4,818결 33부 4속이다. 논이 밭보다 2배 이상 많았다. 1862년(철종 13) 『상주목읍지』에는 기전으로 밭은 5,116결 43부 5속, 논은 4,953결 83부였다. 이처럼 전체 경작량도 증가하고, 밭의 비중이 논보다 커졌음을 알 수 있다. 논의 면적은 소폭 증가한 반면 밭의 면적이 2배 이상 증가하였다. 아마도 논농사는 포화 상태에 이르러 밭농사를 증대한 결과로 보인다.
한편 상주에는 19세기에 이르러 50개의 제언이 확인된다. 여기에는 공검지(恭儉池), 대제지(大堤池), 불암지(佛巖池), 죽전지(竹田池)와 같은 저수지와 굴사제(掘史堤), 말지제(末只堤) 등의 제언을 포함한 것이다. 특히 공검지는 둘레 1만 6647척, 깊이 10척이나 되는 대형 저수지였다. 저수지와 제언들은 면적이 600척에서 2,500척에 이르기까지 크기가 다양하였다. 반면 일반적으로 19세기에 이르러 보(洑)가 발달한 것과는 달리 상주 지역에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밭농사가 증가한 만큼 산간 계곡을 이용한 개간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보가 확인되지 않는 것은 기존의 제언 시설을 이용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실제 상주 지역의 제언은 평야와 산간 지역에 모두 설치되어 있었고, 산간 지역이라도 규모가 작지 않아서 이웃한 함창의 저수지보다 컸다. 또한 일찍부터 토산물로 감, 밤, 호두 등의 과수가 대표적이었는데 이 시기 증가한 밭농사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과수로 추정된다.
함창현의 호수는 368호, 인구가 2,140명이다. 1786년(정조 10) 『함창현읍지』의 원호는 2,637호, 인구는 1만 891명이며 남자는 5,344명, 여자는 5,572명이다. 1832년(순조 32) 『경상도읍지』를 보면 19세기 초반 원호 2,746호, 인구 9,873구이며, 남자는 4,589구, 여자는 5,284구이다. 1899년(광무 3) 『함창군읍지』에는 호구 2267호, 인구 8,011구이며, 남자는 4,248구, 여자 3,763구이다.
외면상으로는 19세기 이래로 계속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러한 원인은 상주와 유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5세기 초반 함창현의 간전(墾田)은 2,929결이며, 논이 1,255결이다. 조선 후기에도 전체 농경지는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832년(순조 32)의 경우 전체 경작지는 2,749결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기전(起田)은 한전(旱田) 877결 67부 4속, 수전(水田) 889결 94부 4속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1899(광무 3)에는 한전 891결 82부 2속, 수전 1,038결 12부 5속으로 전체 기전이 증가하였다. 특히 수전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는데 그만큼 관개 시설이 확충되어 논농사가 활발하였음을 의미한다. 실제로도 함창현에서는 호도 재배가 사라졌으며, 제언의 경우에도 1832년 정화지(井花池)[공감지(工監池)], 입암지(立巖池), 조법산지(助法山池), 성동지(城洞池), 금곡지(金谷池), 저곡지(猪谷池), 송현지(松峴池) 등만 확인되었다. 이런 저수지들은 둘레도 1,906척인 정화지를 제외하고 700척 미만의 작은 규모였다. 1899년에는 정화지만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남지(南池), 동지(東池)와 주암보(周巖洑), 형제보(兄弟洑), 장사보(長沙洑), 성황당보(城隍堂洑), 호남보(虎南洑), 수정보(水晶洑), 대조보(大棗洑)와 같은 대형 보[천방]이 새롭게 축조되었다. 즉, 농경지가 크게 확대된 것은 아니지만 관개 시설의 확충으로 논농사가 증가하였던 것이다.
[재지사족의 형성과 변화]
상주의 토성은 김(金)·박(朴)·주(周)·황(黃), 내성(來姓)은 고(高)·이(李)·형(荊)·나(羅), 사성(賜姓)으로 이씨[이민도(李敏道)]가 있었다. 외촌성(外村姓)으로 윤(尹), 임(林)씨, 청리(靑理)에는 토성으로 장(張)·박(朴)·황(黃)씨와 차성(次姓)으로 심(沈)씨가 있었다. 화령(化寧)은 토성으로 임(任)·고(高)·방(方)·장(張)·전(全)·신(申)씨가 있었다. 중모(中牟)에는 토성으로 김·전(全)·강(姜)·박·방(方)씨와 내성인 심씨가 있다. 단밀(丹密)에는 인리성(人吏姓)인 나(羅)씨와 촌락성(村落姓)인 손(孫)씨가 있었다. 산양(山陽)에는 토성으로 방(芳)·유(庾)·신(申)·채(蔡)가 있으며, 공성(功城)의 토성은 성(成)·손(孫)·장(張)·전(全)씨, 영순(永順)은 속성으로 태(太)씨가 있다. 장천(長川)의 토성은 윤·박씨이며, 연산(連山)의 토성은 윤씨이다. 무림(茂林)의 토성은 김씨, 속성은 김·심씨가 있고, 평안(平安)의 토성은 방(芳)·심씨이다.
상주목은 경상감영이 존재하였던 거읍이지만 토성수에 있어서는 중소군현과 비슷하며, 읍세에 비하여 토성의 세력이 강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속현에도 각기 토성이 있었지만 후세에 사환한 성씨로는 산양 신씨(山陽 申氏)밖에 없었다. 상주의 토성 가운데 일찍이 사환한 상주 김씨는 김득배(金得培)·김선치(金先致) 형제 대 이래로 조선 시대 연이어 사환하면서 명문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이족(吏族)으로 남은 김씨는 박씨, 이씨와 함께 호장층을 세습하였다. 주씨(周氏)와 황씨(黃氏)도 사족으로 발전하였다. 주씨는 선대가 본래 상주의 이족이었으며 선대의 후손인 주세붕 등이 활약하였다. 또한 15세기 초 좌익공신에 녹훈된 황효원(黃孝源)은 상주 황씨였다.
이처럼 상주는 토성의 재지사족들이 열세에 있었지만 타읍 출신 사족들의 이주가 많았다. 풍양의 조운흘(趙云仡)이 처향을 따라 우거하였으며, 상주 김씨의 외손인 노수신(盧守愼)을 비롯한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등 광주 노씨·진주 정씨·합천 이씨 등의 선대가 많이 이주하였다. 이런 가문들은 외가 또는 처향을 따라 온 것이었다. 다양한 연고로 상주에 이거하거나 이거(移去)한 성씨들은 19세기 말까지 확인된다. 한편 상주에 정착한 타읍사족들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향촌 사회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였다.
조선 후기 상주 지역은 사회·문화적으로 안동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충청도에 인접하여 일찍이 인적·물적인 교류가 많았다. 그 결과 16세기 이래로 송준길이 처향인 상주에 우거하고, 호서학파로 대표되는 서인 내지 노론계의 영향을 정치·사상적으로 크게 받았다. 그런 결과 상주 지역은 퇴계학과 호서학이 공존하고, 남인과 서인 내지 노론이 대립·공존하는 지역이기도 하였다. 이런 모습은 상주 지역에 설립된 원사에서도 드러난다. 이를 보면 상주 지역은 사액을 받은 도남서원(道南書院), 흥암서원(興巖書院), 옥동서원(玉洞書院)이 있으며, 그 외 옥성서원(玉成書院), 근암서원(近嵒書院), 봉산서원(鳳山書院), 서산서원(西山書院), 속수서원(涑水書院), 연악서원(淵嶽書院), 효곡서원(孝谷書院), 화암서원(花巖書院), 충렬사(忠烈祠), 충의단(忠義壇) 등이 확인된다. 특히 도남서원은 상주의 수원(首院)이자 동방오현을 비롯한 남인계 인사를 제향한 대표적인 곳이었다. 반면 흥암서원은 송준길을 제향한 노론계 서원으로 상주와 영남 지역 노론의 거점이자, 대원군의 원사 훼철 당시에도 옥동서원과 함께 훼철되지 않았던 곳이다.
상주의 이러한 성향은 함창현과 같이 인근 고을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 전기 함창현에는 토성(土姓)으로 김(金)·오(吳)·임(任)씨가 있었다. 함창 김씨는 고려 중기 사환한 김충(金冲) 이래로 사족과 이족으로 나뉘었다. 함창에는 15세기 이래로 사림파의 이주가 많았다. 홍귀달(洪貴達) 가문이 함창에 자리 잡고, 채수(蔡壽)도 농장을 개설하였다. 홍귀달과 채수는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였고 홍귀달과 채수의 문하에서 많은 사류(士類)들이 배출되어 함창을 자주 출입하였다.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표연말(表沿沫)도 함창 출신이며 표연말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표연말의 증조 표을충이 고려 말에 상주 백화산 아래에 은거한 이래로 함창으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 후기 간행된 읍지 등을 보면 함창의 토성이었던 임·오씨는 사라졌으며, 이외에도 덕봉 김씨(德峯 金氏), 이안의 구(仇)·김·오씨도 사라져서 확인되지 않는다. 1832년 제작한 『경상도읍지』에 의하면 토성으로는 함창 김씨만이 확인된다. 나머지 성씨는 안동 권씨, 부림 홍씨, 인천 채씨, 평산 신씨, 광주·경주·성주 이씨, 의령·영양 남씨, 청주 곽씨, 함양 박씨, 진주 강씨, 진주 류씨, 동래 정씨, 교동 인씨(喬桐 印氏), 순흥 안씨, 경주 손씨, 전주 이씨 등이 확인된다. 1899년에는 함창 김씨, 안동 권씨, 인천 채씨, 의령 남씨, 평산 신씨, 전주 이씨, 경주 이씨, 부림 홍씨, 진주 류씨, 청주 곽씨, 함양 박씨, 백천 조씨(白川 趙氏), 한양 조씨, 동래 정씨, 순흥 안씨, 영해 신씨(寧海 申氏), 남양 홍씨, 광주 김씨(光州 金氏), 진주 강씨, 영일 정씨 등이 확인된다. 즉, 함창 지역의 재지사족은 함창 김씨를 중심으로 낙향과 혼인을 통하여 이주하여 온 가문이 대부분이며 19세기 말까지 계속 다양한 가문들의 이주와 이거(移去)가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창에 먼저 이거하여 온 가문들은 임진왜란 당시 창의 활동을 하고 적극적인 향촌 활동을 통하여 재지적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함창에 건립된 원사(院祠)에는 이러한 가문들의 선조(先祖)를 제향하고 있다. 즉, 임호서원(臨湖書院)[홍귀달·표연말·채수·권달수·채무일], 청암서원(淸巖書院)[류포·류달존·박눌·이겸·류종인·홍약창·남찬·정윤해·박성민·이영갑], 기양서원(岐陽書院)[효령대군사(孝寧大君祠)=청권사(淸權祠)], 기산사(箕山祠)[이각민·이총], 율봉사(栗峰祠)[채무적·채홍·채이항], 경충사(景忠祠)[이축], 신안사(新安祠)[김창집·민진원·이재·김원행·김수근] 등의 사례에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