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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0537
한자 開港期
영어공식명칭 Harbor-opening Period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정의]

1864년 이후부터 1910년 국권 상실까지 상주 지역의 역사.

[개설]

상주 지역에서는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침략 이후 반봉건 농민 항쟁과 위정척사 운동이 전개되었고, 대한 제국기 일본의 침략 이후 국권회복운동이 일어났다.

[행정구역 개편]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근대적 사상이 유입되면서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정부도 근대식 개혁을 통하여 효율적인 지방 통치를 도모하였다. 이에 1895년 제2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의 일환으로 23부제(二十三府制)를 실시하였다 아울러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 지방 행정 구역을 부와 군으로 이원화하였는데, 이때 상주목함창현은 안동부(安東府) 관할의 상주군(尙州郡)함창군(咸昌郡)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지방 행정의 불합리성 때문에 1896년 8월 기존의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실시하였다. 이에 상주군·함창군은 나란히 지금의 경상북도로 편제되었다.

[반봉건 농민 항쟁]

1862년 지배층의 수탈과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경상도 단성(丹城)에서 시작되어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70여 개 고을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른바 임술민란(壬戌民亂)이다. 상주 지역에서는 1862년 5월 15일 백성들이 읍으로 들어와 수탈을 일삼던 인사들의 집을 불태우고, 5월 26일에는 수탈의 담당자였던 아전들의 집을 불태웠다. 나아가 관아에 보관하고 있던 각종 장부를 소각하였다. 이에 정부는 상주목사 한규석(韓圭錫)을 파면하는 한편, 민란의 주동자를 색출하여 처형하였다. 중앙 정부는 민란의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을 설치하였지만, 지방 관원들의 비리는 계속되었고, 백성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경상도 상주 지역에서 동학은 1862년부터 교세가 확산되었고, 1863년에는 유생들이 동학을 배척하는 통문을 돌릴 만큼 동학의 교세는 뿌리가 깊었다. 1894년 5월 무렵부터 상주 지역에도 동학교도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져서, 당시 일본 영사관은 상주 지역을 경상도에서 동학농민군의 소굴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1894년 6월 일본군이 불법적으로 경복궁을 침범한 갑오변란 이후 상주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세력은 더욱 강해졌다. 그런 가운데 8월 29일 석문(石門)에서 일본군이 농민군을 습격하였다. 패퇴한 농민군은 일시적으로 흩어졌지만, 곧 규합하여 9월 22일 읍으로 들어가 관아를 장악하였다. 이어 농민군은 일본군 병참 기지를 공격하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이에 9월 28일 일본군은 읍성을 공격하여 동학농민군을 격퇴하였다. 일본군이 철수한 뒤 상주 관아를 장악한 향리들은 보수집강소 민보군(民堡軍)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상주 출신의 전 승지(承旨) 정의묵(鄭宜默)을 경상도 북부 지역 소모사로 임명하여 농민군 진압을 주도하게 하였다. 상주소모영은 1895년 1월 24일 해체될 때까지 상주는 농민군 진압의 거점이 되었다.

[위정척사 운동]

1866년 10월 프랑스의 침략에 즈음하여 조정에서는 영남소모사로 이종상(李鍾祥)과 정윤우(鄭允愚)를 파견하여 영남 각 지역에서 소모책을 차출하고 의병을 규합하고자 하였다. 이때 흥해(興海)[경상북도 포항 지역의 옛 이름]에서는 김천익(金千益), 청도에서는 박시묵(朴時黙), 성주에서는 이원조(李源祚) 등이 소모책으로 위촉되어 의병을 조직하였다. 상주에서는 류주목(柳疇睦)이 소모책으로 위촉되어 의병을 조직하였다. 류주목은 당시 우의정 류후조(柳厚祚)의 아들이었으며, “의병을 일으켜 프랑스의 침략에 저항하라”는 아버지의 명을 받고 의병 부대를 조직하였다.

1881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에 반대하며 올린 이만손(李晩孫)을 중심으로 한 영남 지역 유생들의 상소가 전국으로 확산하였다. 상주 지역의 유생들은 안동부에서 참여한 유생 40명에 이어 24명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소수(疏首) 정찬우(鄭纘愚)·조구영(趙龜永)·정현기(鄭顯基)·홍원섭(洪元燮)·강호영(姜鎬永)·김상근(金常根), 택소(擇疏) 정원석(鄭元錫), 사소(寫疏) 손수란(孫秀蘭)·유도균(柳道均)·이인섭(李仁燮)·채규형(蔡圭亨)·홍진섭(洪震燮)·권필성(權必性)·조병희(趙秉曦)·김병연(金秉淵)·고정(高瀞)·황휘선(黃彙善)·김찬규(金瓚圭), 배소(陪疏) 김원진(金遠振), 관행(管行) 홍선목(洪選穆)·이신태(李信泰)·고언상(高彦相)·유도묵(柳道黙)·채홍우(蔡鴻愚)·강달희(姜達凞)·송진신(宋鎭兟) 등이다.

[국권회복 운동]

전기 의병에서 1896년 3월 24일 상주 유생들은 김산의진(金山義陣)에 참여하였다. 즉, 상주 유생들은 김산·선산 지역의 유생들과 함께 김산(金山)에서 창의하였다. 대장 이기찬(李起璨)을 비롯하여 조동석(趙東奭)·강무형(姜懋馨)·이기하(李起夏)·조남식(趙南軾)·이시좌(李時佐) 등이 상주 출신이다.

후기 의병에서는 이강년의진(李康秊義陣)에 참여한 김진구(金鎭九)·이원재(李元宰)·채섬환(蔡暹奐)·유규년(柳奎秊)·김만원(金萬源) 등이 상주 출신이다. 그 외 1907년 8월 이후 창의한 노병대(盧炳大)·이병억(李秉億)·신돌석(申乭石)·장학이(張鶴伊)·조운식(趙雲植)·권상중(權相中) 등도 상주 출신이다. 그중 노병대조운식은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거느린 의병장이었다.

상주 지역의 애국계몽운동은 국권 회복을 위한 신교육구국운동(新敎育救國運動)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주류를 이루었다. 상주 지역에서 조직된 애국계몽운동 단체는 없지만, 상주 출신의 선각적인 유생들이 1904년 서울에서 결성된 충의사, 1908년 대구에서 조직된 대한협회 대구지회, 1908년 서울에서 조직된 교남교육회 등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학문과 신문물을 수용하고, 상주 지역에서 신교육구국운동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상주 지역에는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1906년 설립된 사립 광흥학교(廣興學校)를 비롯하여 1908년 설립된 사립 풍창학교(豊昌學校), 1909년 설립된 남명학교(南明學校), 그리고 함창에 설립된 창명학교(昌明學校) 등이 있었다.

1907년 1월부터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상주 출신의 혁신적인 유림 정재덕(鄭在悳)과 강신규(姜信圭)가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상주군에서는 1907년 4월 국채보상상주의무소(國債報償商州義務所)가 설립되어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 즉, 상주 출신 김재익(金在益)과 박정준(朴正準) 등 11인이 3월 말 국채보상의무소를 설립하고 경고문을 발표하였으며, 1907년 4월 9일 김재익과 박정준이 「국채보상상주의무소취지서(國債報償尙州義務所趣旨書)」를 발표하는 등 상주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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