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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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영어공식명칭 | Korean war |
이칭/별칭 | 6·25 사변,한국전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용성 |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휴전 성립까지 경상북도 상주에서 지속된 남한과 북한 간의 전쟁.
[개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서 전면적인 불법 기습 남침을 시도하였다. 북한군은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으며, 한 달 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밀고 내려왔다. 남한군은 한때 상주의 화령에서 북한군의 선봉을 섬멸하였다. 그리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한편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실시하여 서울을 되찾고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경과]
북한군의 남침은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된 계획적인 침략이었다. 따라서 불법 기습 남침을 국군이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부는 대전과 대구로 옮겨 갔다. 7월 20일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은 영남 지방과 호남 지방으로 나누어 남하하였다. 호남 지방으로 진격한 북한군 제4사단은 진안, 장수, 합천 방면으로 공격하여 8월 초에는 고령을 공격하였다.
영남 지방으로 남하한 북한군 제15사단은 상주 화령으로 공격하여 들어왔다. 이에 7월 17~25일 국군 제17독립연대가 북한군 제15사단을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교통 요지인 화령장(化寧場)[현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 일대에서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비록 7월 30일경 북한군에 의하여 상주 지역이 점령당하였지만, 화령장전투의 승리로 북한군의 남하를 일시적으로 저지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국군과 유엔군은 약 1주일간의 시간을 획득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상주 점령 이후 북한군은 상주군 인민위원회라는 자치제를 조직하여 청장년을 폭탄과 무기 등을 나르게 하는 강제 노역에 동원하였다. 한편, 우익 인사들을 처단하고, 식량을 강제 징발하고, 가축을 모아 전선으로 공급하였다. 또한 피란 가지 못한 교원이나 지식인을 강제 소집하여 공산주의 교육을 시켰다.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었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전투가 한창인 8월 18일 북한군의 포탄이 대구 시가지에 떨어지면서 전쟁은 급박한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뉴욕타임스』지는 “한국의 전황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일보의 후퇴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엄명을 내렸다. 그 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중순부터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격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9월 15일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은 전면적으로 후퇴하였고, 전황은 반전되어 서울을 되찾고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당연히 상주에 있던 북한군도 격퇴되었다. 상주군청과 경찰서 등 행정 관서가 업무를 재개하면서 복구 사업도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상주군은 북한군이 퇴각하는 9월 하순까지 약 2개월 동안 공산 치하에서 곤란을 당하였다.
[결과]
6·25 전쟁은 3년 1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특히 상주군은 1950년 7월 30일부터 9월 하순까지 약 2개월 동안 북한군의 치하에 있었다. 그동안 사망 848명, 부상 336명, 학살 73명, 납치 32명, 행방불명 351명 등 1,640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군청과 경찰서 등 관공서는 물론 일반 주택도 3,500여 호가 파괴되었다.
[의의와 평가]
6·25 전쟁 당시 상주 지역은 참혹한 전장 중의 한 곳이었으며, 많은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다. 상주에서 벌어진 화령장전투로 국군과 유엔군은 약 1주일간의 귀중한 시간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화령장전투는 아군의 재편성과 전선 조정을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곧바로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는 데도 시간적인 여유를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