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0560
한자 義兵運動
영어공식명칭 Righteous Army Movement
이칭/별칭 의병전쟁,의병투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정의]

1896년 3월부터 1910년경까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경상북도 상주 지역의 의병 항쟁.

[개설]

한국사에서 개항기 및 대한 제국기의 의병은 1894년부터 1896년까지 전개된 전기 의병과 1905년부터 1910년경까지 전개된 후기 의병으로 나눌 수 있다. 전기 의병은 제1차 의병 전쟁, 갑오의병, 을미의병, 병신의병, 후기 의병은 제2차 의병 전쟁, 을사의병, 병오의병, 정미의병으로도 부른다. 경상북도 상주 지역 인사들은 전기 의병 시기 김산의진(金山義陣), 후기 의병 시기 이강년의진·노병대의진·조운식의진 등에서 활동하였다.

[전기 의병]

갑오의병은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한 1894년 6월 21일[양력 7월 23일] 갑오변란을 계기로 일어났다. 대표적인 의병진은 공주 유생 서상철(徐相轍)의 안동의병(安東義兵)과 상원의 관료 출신 김원교(金元喬)의 상원의병(祥原義兵)이다. 안동의병과 상원의병은 무력투쟁을 통하여 일본 세력을 쫓아내고자 하였다.

을미의병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을미사변을 계기로 일본과 친일 정권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1895년 9월 18일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 출신 문석봉(文錫鳳)이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는 목적으로 충청남도 유성(儒城)에서 창의하였다. 을미의병의 효시인 이른바 유성의진(儒城義陣)이었다. 곧이어 1895년 11월 15일[양력 12월 11일] 단발령을 계기로 반침략·반개화를 목적으로 한 의병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였다. 그 시작은 11월 16일 경상북도 의성 출신 김하락(金河洛)의 이천의진(利川義陣)이었다.

1896년 1월부터 의병은 전국으로 확산하였다. 1월 18일 이소응의 춘천의진(春川義陣), 1월 17일 민용호의 강릉의진(江陵義陣), 1월 28일 유인석의 제천의진(堤川義陣), 1월 16일 김복한의 홍주의진(洪州義陣), 1월 17일 권세연의 안동의진(安東義陣) 등이 대표적이다.

경상북도 지역의 안동의진은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인들을 비롯하여 안동 유림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 후 경상북도 북부 지역 14개 군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1월 23일 예안의진(禮安義陣)과 영주의진(榮州義陣)에 이어 예천·문경·영양·봉화·영해·청송·풍기·순흥·의성·영덕·진보 등지에서도 각각 의병진이 결성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3월 24일에는 상주·김산·개령·지례·선산 등지의 유생들도 김산의진을 결성하였다.

상주 지역의 유생들은 김산·선산 지역의 유생들과 함께 김산(金山)에서 창의하였다. 대장 이기찬(李起璨)을 비롯하여 조동석(趙東奭)·강무형(姜懋馨)·이기하(李起夏)·조남식(趙南軾)·이시좌(李時佐) 등이 상주 출신이다.

상주 유생들은 이미 가노(家奴) 수백 명을 동원하여 기의하고자 계획하였으나 가노들이 한사코 따르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3월 23일 이기찬은 허성산(許盛山)·강석포(姜石圃)·양벽도(梁碧燾)·김봉초(金鳳超) 등 종사(從士) 수십 명만으로 김산으로 들어가 창의에 참여하였다.

[후기 의병]

1904년 2월 8일 시작된 러일전쟁과 2월 23일 한일의정서, 그리고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등 노골화된 일제의 침략 과정에서 국권을 수호하려는 의병투쟁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905년 8월 강원도에서 원용팔의 원주의진(原州義陣)과 충청북도에서 정운경의 단양의진(丹陽義陣)이 결성되어 대일 항전을 시작하였다. 1906년 3월 경상북도에서 정용기의 산남의진(山南義陣)과 4월 신돌석의 영릉의진(寧陵義陣), 4월 충청남도에서 민종식의 홍주의진(洪州義陣)이 결성되어 대일 항전을 벌였다.

특히 영남 지방에서 일어난 경상북도 남동부 지역의 산남의진과 경상북도 동해안 지역의 영릉의진은 장기간의 대일 항전을 통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는 등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외 영양·진보에서 이현규(李鉉奎), 안동에서 류시연(柳時淵) 등이 창의하였으며, 전기 의병에서 불굴의 항전을 벌였던 김도현(金道鉉)이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칠조약을 체결한 후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에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였다. 1907년 원주진위대와 강화분견대의 봉기를 시작으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중 이강년의 제천의진(堤川義陣)을 비롯한 민긍호부대(閔肯鎬部隊)·허위부대(許蔿部隊)·산남의진(山南義陣)·신돌석부대(申乭石部隊) 등이 대표적인 의병 부대이다.

1907년 12월 경기도 양주에 집결한 전국 각처의 의병장들은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펼치기 위한 연합작전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1908년 2월 서울 진공 작전이 좌절되면서 작전에 참여하였던 의병 부대들은 각처의 근거지로 이동하였다.

서울 진공 작전 실패 이후 허위를 비롯한 휘하의 의병장들은 임진강 유역에서 서울 진공 작전을 재개하였다. 1908년 6월 체포된 허위가 1908년 10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자, 휘하의 의병장들은 제각기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주 출신으로 김진구(金鎭九)·이원재(李元宰)·채섬환(蔡暹奐)·유규년(柳奎秊)·김만원(金萬源) 등을 비롯하여 다수의 인사가 이강년의진에 참여하였다. 그 외 1907년 8월 이후 창의하였던 노병대(盧炳大)·이병억(李秉億)·신돌석(申乭石)·장학이(張鶴伊)·조운식(趙雲植)·권상중(權相中) 등이 상주 출신이다. 그중에서도 노병대조운식은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거느린 의병장이었다.

[의의와 평가]

전기 의병에서 활동하였던 상주 지역의 유생들은 김산의진에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후기 의병에서는 노병대조운식이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거느리고 활동하였으며, 이강년의진을 비롯하여 산남의진과 연결되어 청송·의성·경산 등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상주 지역의 한말 의병운동은 전후기에 걸쳐 대일 항전을 전개한 역사적 전통이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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