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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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今突城 |
영어공식명칭 | Geumdol Fortress |
이칭/별칭 | 상주산성,백화산성,보문성,금돌산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산98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창국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0년~2001년 - 금돌성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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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8년~2019년 - 금돌성 대동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20년 9월 14일~2020년 11월 13일 - 금돌성 천년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8년 - 금돌성 북문지 성벽 복원 |
문화유산 지정 일시 | 1985년 8월 5일 - 금돌성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1호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금돌성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4년 5월 17일 - 금돌성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 |
현 소재지 | 금돌성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산98 |
성격 | 산성 |
양식 | 포곡식 |
크기(높이,길이,둘레) | 6,453m[둘레]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황학연 |
문화유산 지정 번호 |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백화산에 있는 삼국 시대 산성.
[개설]
금돌성(今突城)은 삼국 시대에는 ‘금돌성’, 고려 시대에는 ‘상주산성(尙州山城)’으로 불렸고, 조선 시대에는 ‘백화산성(白華山城)’·‘보문성(普文城)’ 등으로 불렸다. 금돌성은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변경되었으며,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기본법」이 시행됨에 따라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되었다.
[위치]
금돌성은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산98번지에 있다. 보문사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용추가 나오는데, 서쪽으로 가면 산성이 보인다. 금돌성의 남쪽에는 상주에서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는데, 고대에는 수봉리의 넓은 들을 지나 현재의 문바우라는 고개[석문재]를 넘어 백제 지역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변천]
『삼국사기(三國史記)』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 6월 21일에 군사 5만 명으로 소정방의 군대에 호응하도록 하였고, 백제 항복 후 7월 29일 부여에 도착할 때까지 태종무열왕이 금돌성에 머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성안에는 ‘대궐터’라 불리는 곳이 남아 있다. 『고려사(高麗史)』 권24, 고종 41년(1254) 10월 19일 몽골의 6차 침입 때 차라대(車羅大)가 상주산성을 공격하자 황령사(黃嶺寺)의 승려 홍지(洪之)가 상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8, 상주목 고적조 백화산에 “옛날 석성(石城)이 있다. 둘레가 1,904척[약 577m]이고, 안에는 시내가 1개, 샘이 5개 있다. 현재는 폐하였다”라고 하였다. 백화산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돌린 두 형제의 내용이 그려진 「월간창석형제급난도」[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금돌성은 정비·복원에 대한 기초 자료를 확보하고자 2000년부터 2001년까지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성벽은 내성과 외성 모두 지형 조건에 따라 협축법(夾築法)과 내탁기법(內托技法)에 의한 편축법(片築法)이 사용되었다. 동서남북 성벽과 내외성 공유성벽·망대 12개소와 망루 3개소, 문지 7개소[외성 2개소, 내성 2개소, 내성·외성 암문 각 1개소, 외성과 공유성벽에 수문 1개소], 건물지 8개소[내성 5개소, 외성 1개소, 외성 밖 2개소], 보문암지와 용문사지 등이 확인되었으며,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의 기와편·도기편·자기편 등의 유물이 채집되었다.
금돌성의 초축 시기와 성벽의 구조를 확인하기 위한 정밀 발굴 조사의 대상지 선정을 위하여 2018~2019년 대동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내성은 둘레 4,297m이고, 문지 4개소, 망대지 7개소, 망루지 1개소였다. 외성은 둘레 2,156m이고, 문지 2개소, 시설물지 1개소, 망대지 5개소, 망루지 1개소, 성내 건물지 1개소가 확인되었다. 차단성은 길이 1,060m이며, 북벽 정상과 남벽 정상에서 각각 망대지가 확인되었다. 삼국 시대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성곽의 축조 시기는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로 추정된다.
금돌성 내성·외성의 연접부[2019년 보고서 망대지 12표기 지역]와 외성의 남쪽벽에 대하여 2020년 9월 14일부터 11월 13일까지 천년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연접부는 자연 암반 위에 깬돌을 사용하였고, 외성은 자연 암반 혹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깬돌을 사용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다. 축조 시기는 통일 신라 시대 이후 고려 시대까지로 추정된다.
[형태]
금돌성은 백화산의 주봉인 한성봉(漢城峰)에서 동쪽으로 뻗은 3개의 능선 중 가운데 계곡을 두고 양편 2개 능선의 정상부와 계곡을 내성과 외성이 에워싸고 있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형태는 장방형에 가깝고, 지형이 낮은 동쪽을 보완하기 위하여 내성에서 연장된 외성과 더 밖으로 협곡을 이용한 차단성이 구축되어 있다. 전체 둘레는 6,453m이고, 성벽의 폭은 1~4m이다.
[현황]
금돌성은 현재 대부분 무너져서 높이 1.5~2m 정도만 잔존하고 있으며, 후대 화전민 또는 민간 신앙인의 활용으로 훼손이 이루어졌다. 1978년 국방 유적 보수 사업에 따라 북쪽 내성 중 해발 800m 지점에 있는 북문지 성벽 80m가 복원되었다.
[의의와 평가]
금돌성은 삼국 시대 때 신라 서북방에 있던 군사적 거점지이자 백제 정벌의 전진 기지로 활용되는 등 삼국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성이다. 빼어난 자연 경관과 더불어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 의병 활동지 등 구국 활동과 관련된 역사적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