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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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尙州 衾欣里 吏部谷 土城 |
영어공식명칭 | Sangju Guemheun-ri Ibugok Tosung (Mud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금흔리 산1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창국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8년 12월 28일~1999년 12월 23일 - 상주 금흔리 이부곡 토성 시굴 및 측량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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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21년 - 상주 금흔리 이부곡 토성 발굴 조사 |
문화유산 지정 일시 | 1998년 4월 13일 - 상주 금흔리 이부곡 토성 경상북도 기념물 제127호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상주 금흔리 이부곡 토성 경상북도 기념물로 변경 지정 |
현 소재지 | 상주 금흔리 이부곡 토성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금흔리 산1 |
성격 | 토성 |
양식 | 포곡식 |
크기(높이,길이,둘레) | 1,239m[둘레] |
면적 | 112,947㎡ |
문화유산 지정 번호 | 경상북도 기념물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낙상동과 사벌국면 금흔리와 엄암리에 걸쳐 있는 토성.
[개설]
상주 금흔리 이부곡 토성(尙州 衾欣里 吏部谷 土城)은 경상북도 상주시의 수계가 모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요충지에 있는 성이며, 사벌국과 관련되어 주목을 받은 토성이다. 1998년 4월 13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2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변경되었다.
[위치]
상주 금흔리 이부곡 토성은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금흔리 산1번지 금실마을 뒷산 성안산(城安山) 정상부 일대에 있다. 상주 금흔리 이부곡 토성 서쪽에는 외서천과 동천이 합수하여 남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남쪽에는 동천과 병성천이 합수하여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형태]
상주 금흔리 이부곡 토성은 성안산과 성안산 북쪽과 남쪽, 동쪽에 있는 높이 155.5m, 157.8m, 141.1m의 구릉 정상부를 중심으로 계곡을 감싼 ‘C’ 자 형태의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상주 금흔리 이부곡 토성의 둘레는 1,239m이고 면적은 11만 2947㎡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상주 금흔리 이부곡 토성은 정비·보존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1998년 12월 28일부터 1999년 12월 23일까지 시굴 조사와 측량 조사를 실시하였다. 시굴 조사는 남쪽의 구릉 정상부로부터 북서쪽의 성안산 정상부에 이르는 일부 구간에서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성벽의 토축은 구릉 아래쪽의 토사를 방지하기 위하여 영정주(永定柱)[폭 1m 사이에 2개, 굵기 약 30㎝]를 세우고 사이에 성토하였으며, 성토는 2차[1차는 편축 방식의 토층, 2차는 각 층이 10~30㎝ 정도의 두께인 켜쌓기 성토]에 걸쳐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2021년 상주박물관에서 발굴 조사를 하였는데, 조사 결과 토성의 성벽, 초기 철기 시대 도랑 시설, 삼국 시대 집터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초기 철기 시대의 삼각형 점토 대토기와 굽다리접시토기, 삼국 시대 굽다리접시[高杯]와 긴목항아리[長頸壺] 및 그물추 등이다.
상주 금흔리 이부곡 토성의 북쪽과 동쪽 사면 하단에 유물 산포지[민무늬토기와 통일 신라 시대 토기편], 남동쪽 사면 하단에 유물 산포지[민무늬토기와 삼국 시대 토기편], 남서쪽 사면에 토기 산포지[민무늬토기와 삼국 시대 토기편, 성혈 암반], 북쪽으로 300m 정도 떨어져 유물 산포지[민무늬토기와 삼국 시대 토기편 및 철제 유물], 토성의 내부 사면 및 평지에 유물 산포지[문지 남쪽, 민무늬토기와 삼국 시대 토기편, 성혈 암반]가 각각 분포하고 있다. 2021년에도 상주박물관 주관으로 추가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현황]
상주 금흔리 이부곡 토성의 내부와 외부는 현재 논·밭·과수원으로 경작되고 있고, 현대에 조성된 민묘가 다수 산재하여 원래 지형의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상주 금흔리 이부곡 토성은 발굴 조사 당시 출토된 유물로 볼 때 삼국 시대 이후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