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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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尙州郡邑誌 |
영어공식명칭 | Sangju-gun Eupji |
이칭/별칭 | 경상북도상주군읍지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재두 |
편찬 시기/일시 | 1899년 - 『상주군읍지』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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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
소장처 | 상주박물관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경천로 684[삼덕리 산86] |
성격 | 읍지 |
편자 | 상주군수 |
간행자 | 상주군수 |
권책 | 1책 42장 |
행자 | 20행 10자 |
규격 | 37.2㎝[세로]|25.2㎝[가로] |
권수제 | 경상북도상주군읍지(慶尙北道尙州郡郡邑誌) |
[정의]
1899년 경상북도 상주군에서 편찬한 관찬 읍지.
[개설]
『상주군읍지(尙州郡邑誌)』는 대한제국 내부(內部)의 읍지수상령(邑誌修上令)에 따라 경상북도 상주군에서 1899년(광무 3)에 편찬한 관찬 읍지이다.
[저자]
『상주군읍지』는 경상도 상주군수의 주도로 편찬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개항 이후 조선은 근대 국가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지방 행정 제도를 개편하였다.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고 부목군현의 지방 행정 구역을 군으로 일치시켰으며, 1896년에는 23부를 13도로 변경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 대한제국 내부는 1899년 양력 4월 13도 관찰부에 훈령을 내려 고을마다 읍지와 지도를 각 2건씩 정서하여 제출하라는 읍지수상령을 내렸다. 이에 경상북도 상주군수는 이전에 편찬한 읍지를 바탕으로 『상주군읍지』를 편찬하였다.
[형태/서지]
『상주군읍지』는 1책 42장의 필사본으로 세로 37.2㎝, 가로 25.2㎝이다. 검은색 인찰지에 20행 10자로 정서하였다. 표제와 권수제는 ‘경상북도상주군읍지(慶尙北道尙州郡郡邑誌)’이다.
[구성/내용]
책의 앞부분에는 채색 지도와 목록을 두었다. 수록 항목은 건치 연혁, 속현, 군명, 관직, 성씨, 풍속, 산천, 방리(坊里), 고적, 형승, 관애(關隘), 봉수, 호구, 전부(田賦), 봉름(俸廩), 군액(軍額), 진공(進貢), 토산(土産), 성지(城池), 임수(林藪), 창고, 군기(軍器), 제언, 교량, 도서(島嶼), 장시, 공해(公廨), 학교, 단묘(壇廟), 누정, 도로, 역원, 불우(佛宇), 관적(官蹟), 과거(科擧), 인물, 충절(忠節), 효행(孝行), 열행(烈行), 능묘(陵墓), 제영(題詠), 책판(冊板) 순이다.
호구 항목의 원호는 1만 7877호, 인구는 6만 5035명으로 『경상도읍지』 「상주목읍지」[1832]와 일치한다. 관적 항목은 신라 김유신부터 이한응(李漢膺)까지 상주에 부임한 역대 지방관의 명단과 최종 관력을 기술하였다. 이한응은 1897년부터 1900년까지 상주군수로 재임하였다.
책판 항목의 경우 『소학대전(小學大全)』·『동은집』·『도덕경』은 읍부내, 『소재집』·『우복집』은 도남서원, 『선원집』·『청음집』은 서산서원, 『구완집』은 남장사, 『동춘집』은 흥암서원, 『월간집』·『창석집』은 옥성서원, 『우암집(寓菴集)』·『한음집』은 근암서원에 각각 소장되어 있음이 명기되어 있다. 반면 『경상도읍지』 「상주목읍지」[1832] 비판(碑板) 항목에는 책판이 없다고 기재하였다.
한편 상주박물관의 『상주목읍지』는 『상주군읍지』[1899]를 『광서20년 시헌력』[1894] 뒷면에 인찰지와 행자수 구분 없이 내용 위주로 베낀 초본(抄本)이다. 『상주군읍지』를 수록 순서대로 필사한 뒤, 이후 『구황촬요(救荒撮要)』 등을 베꼈으며 언문으로 번역한 내용도 실려 있다. 지도는 없으며, 관적은 1897년 부임한 이한응까지이다.
[의의와 평가]
1899년에 편찬한 조선 및 대한제국 시기 마지막 관찬 읍지이다. 19세기 말 상주군 관아에서 읍지에 담고자 하였던 지역의 역사, 고적, 인물 등의 내용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