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7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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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甄萱 |
영어공식명칭 | Gyeon Hw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위은숙 |
[정의]
남북국 시대 상주 지역에서 활동한 후백제의 초대 국왕.
[가계]
견훤(甄萱)[867~936]의 아버지는 상주 가은현(加恩縣)[현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의 농민 출신으로 뒤에 상주 지역의 호족이자 장군이 된 아자개(阿慈介)이다. 『삼국사본전(三國史本傳)』에 따르면 견훤은 원래 이(李)씨였는데 후에 견(甄)씨로 성씨를 바꾸었다고 한다. 견훤의 동생은 능애(能哀)·용개(龍盖)·보개(寶盖)·소개(小盖)와 여동생인 대주도금(大主刀金) 등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따르면 견훤은 견신검(甄神劍)·견양검(甄良劍)·견용검(甄龍劍)·견금강(甄金剛)·견능예(甄能乂) 등 10여 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사위는 박영규(朴英規)와 지훤(池萱)이다.
[활동 사항]
견훤은 867년(신라 경문왕 7)에 태어났다. 성장하여 경군(京軍)에 들어갔다가 서남해안의 방수군 비장으로 파견되었다. 889년(진성여왕 3) 전국적으로 농민 반란이 발생하자 견훤도 5,000여 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892년 무진주(武珍州)[현 광주광역시]로 입성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900년에는 완산주[현 전라북도 전주시]로 천도하고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견훤은 완산주 천도 이후, 후백제의 배후 지역인 서남해안 일대와 고려와의 접경 지역인 한강 상류의 충청도 내륙 지역, 그리고 신라와 인접한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지역으로 영토 확장에 나섰다. 특히 경상도 지역의 경우는 상주를 비롯한 북부 지역과 경주에 인접한 지역이 공략 대상이었는데, 견훤이 직접 전장에 나설 정도로 힘을 쏟았다.
920년 견훤은 1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대량(大良)[현 경상남도 합천군]으로 진격하여 대야성(大耶城)과 구사성(九史城)을 함락하였으나 신라가 고려에 처음으로 원병을 요청하자 철군하였다. 이후로도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조물성을 공격하는 등 신라군과 원병으로 참전한 고려군을 상대로 전투를 이어 갔다. 927년에는 원병을 이끌고 내려오던 왕건의 군대를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크게 이긴 뒤 경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옹립하였다. 이후 929년 말까지 후백제는 고려와의 전투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으나 930년 고창(古昌)[현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전투에서 고려에 대패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935년 견훤이 맏아들인 견신검 대신 견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견신검·견양검·견용검 형제가 정변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였다. 이후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에 귀부하였고, 왕건은 견훤을 위로하여 상부(尙父)의 지위와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견훤은 936년에 후백제가 멸망한 뒤 황산불사(黃山佛舍)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견훤의 묘소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18-3에 있다. 1981년 12월 21일 전견훤묘(傳甄萱墓)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전견훤묘는 견원왕릉이라고도 불리는데, 묘소 앞에는 1970년도에 견씨(甄氏) 문중에서 건립한 ‘후백제왕견훤릉(後百濟王甄萱陵)’이라고 새긴 비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