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7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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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尙顔 |
영어공식명칭 | Ko Sangan |
이칭/별칭 | 사물(思勿),태촌(泰村),남석(南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53년 - 고상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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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고상안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576년 - 고상안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78년 - 고상안 성환도찰방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81년 - 고상안 함창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고상안 산양의병진 치병장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94년 - 고상안 삼가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01년 - 고상안 지례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02년 - 고상안 함양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06년 - 고상안 울산판관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07년 - 고상안 풍기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08년 - 고상안 사직하고 낙향 |
몰년 시기/일시 | 1623년 - 고상안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45년 - 고상안 영고사 배향 |
출생지 | 용궁현 왕태동 - 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 왕태리 |
거주|이주지 | 경상도 용궁현 왕태동 - 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 왕태리 |
거주|이주지 | 남석정 - 경상북도 문경시 흥덕동 |
거주|이주지 | 영고서재 - 경상북도 문경시 흥덕동 |
부임|활동지 | 함창현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
부임|활동지 | 직산현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
부임|활동지 | 삼가현 -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
부임|활동지 | 지례현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
부임|활동지 | 함양군 - 경상남도 함양군 |
부임|활동지 | 울산군 - 울산광역시 |
부임|활동지 | 풍기군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군 |
묘소|단소 | 고상안 묘소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대조리 |
사당|배향지 | 영고사 - 경상북도 문경시 흥덕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개성(開城) |
대표 관직 | 풍기군수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대조리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고상안(高尙顔)[1553~1623]의 본관은 개성(開城)이며, 자는 사물(思勿), 호는 태촌(泰村)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을 지낸 고수연(高壽延)이고, 할아버지는 충의교위 고극공(高克恭)이다. 아버지는 좌부장 고천우(高天佑)이고, 어머니는 습독 강희언(康希彦)의 딸 신천 강씨(信川 康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사직 박계옥(朴啓沃)의 딸 고령 박씨(高靈 朴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장일(張逸)의 딸 순천 장씨(順天 張氏)이다. 아들은 고이절(高爾節)·고이행(高爾行)·고이령(高爾齡)이고, 사위는 이경(李璟)·금개(琴愷)·권명남(權命南)·이문욱(李文煜)·정산보(鄭山甫)이다. 형은 고상증(高尙曾)이다.
[활동 사항]
고상안은 1553년(명종 8) 경상도 용궁현 서면 왕태동[현 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 왕태리]에서 태어났다. 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76년 문과에 급제한 뒤 1578년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으로 부임하였다. 1581년 함창현감으로 부임한 뒤에는 보(洑)를 축조하여 상주와 함창 지역 3,000~4,000두락의 들에 관개(灌漑)가 가능하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조정에 들어가 좌랑과 감찰, 정랑을 역임하고 1591년 낙향하였다.
고상안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침입하자 산양의병진의 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관찰사의 명령으로 당시 공석이던 예천군수의 업무를 대행하였다. 1594년 삼가현감이 되었을 때 도원수 권율의 천거로 통영에서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무과 별시 시관(試官)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599년에는 유풍(儒風)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지역 유림과 함께 용궁향교를 중건하고 『소학(小學)』과 『대학(大學)』 등을 가르쳤다.
고상안은 1601년 지례현감을 거쳐 1602년 함양군수로 부임하였고, 1606년 울산판관으로 부임하였으나 곧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607년 풍기군수가 되어 황섬(黃暹)·곽진(郭𡺽)과 함께 강학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지금의 문경시 흥덕동에 남석정(南石亭)을 짓고 학문을 닦으며 장수처(藏修處)로 삼았다. 고상안은 이후 가족을 이끌고 초동(草洞)으로 이주하여 은거하다가 1623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고상안의 저술로는 1898년에 간행된 6권 3책의 『태촌집(泰村集)』과 1619년(광해군 11)에 작성된 농사 교본인 『농가월령(農家月令)』 필사본 1책이 전한다.
[묘소]
고상안의 묘소는 상주시 함창읍 대조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고상안은 1845년(헌종 11) 지금의 문경시 흥덕동에 있는 영고서재(潁皐書齋)의 별사인 영고사(潁皐社)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