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7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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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仁繼 |
영어공식명칭 | Ko Ingye |
이칭/별칭 | 선승(善承),월봉(月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용신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용신리에 있는 효곡서원에 배향된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고인계(高仁繼)[1564~1647]의 본관은 개성(開城)이며, 자는 선승(善承), 호는 월봉(月峯)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고극검(高克儉)이고, 할아버지는 주부 고윤종(高胤宗)이다. 아버지는 전력부위 고경운(高慶雲)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安東 金氏)이다. 부인은 채유부(蔡有孚)의 딸 인천 채씨(仁川 蔡氏)이고, 아들은 고용즙(高用楫)·고용우(高用雨)이다. 사위는 부사 전명룡(全命龍), 사인 홍유(洪曘)이다. 고인계는 고성군수를 지낸 큰아버지 고흥운(高興雲)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활동 사항]
고인계는 1564년(명종 19) 용궁현 왕태리[현 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 왕태리]에서 태어났다.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06년 치러진 식년시에서 을과 7위로 급제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성균관학유를 거쳐, 학록 겸 태상시봉사, 학정, 박사로 승진하였다. 1611년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 1612년에는 도감낭청이 되었으나 무고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10월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이후 영수(潁水) 가에 집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며 10여 년간 은거하였다.
고인계는 인조반정 이후인 1623년(인조 1)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어 관직에 복귀한 뒤 곧이어 형조좌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1624년(인조 2) 충청도도사로 부임하였다가 병이 들어 사직하고 돌아와 『호련록(湖蓮錄)』을 저술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정랑이 되었다가 얼마 후 예안현감에 제수되었지만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가족을 이끌고 문경시 영순면 김용리에 정착하였으며, 이후 공조정랑·성균관사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인계는 팔순(八旬)을 넘겨 1645년에 통정대부 용양위부호군에 제수되었고, 1647년 6월 사망하였다.
[묘소]
고인계의 묘소는 상주 송내(松內)[현 상주시 낙동면 물량리]에 있었다고 전하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상훈과 추모]
고인계는 1724년(경종 4) 상주 효곡서원(孝谷書院)에 배향되었다. 1844년(헌종 10) 현 문경시 영순면 김용리에 있던 죽곡사(竹谷祠)에 고윤종·고흥운·고유와 함께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