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8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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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大膺 |
영어공식명칭 | Shin Daeeung |
이칭/별칭 | 화석(華石),대유(大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상주 출신의 문신.
[가계]
신대응(申大膺)[1789~1863]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대유(大猷), 호는 화석(華石)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신재달(申再達)이고, 할아버지는 신이협(申以恊)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신영눌(申永訥)이고, 어머니는 조묵연(趙黙然)의 딸 풍양 조씨(豊壤 趙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곽진교(郭鎭敎)의 딸 현풍 곽씨(玄風 郭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김재휘(金載徽)의 딸 일선 김씨(一善 金氏)이다. 아들은 신우규(申禹圭)·신병규(申秉圭)이다.
[활동 사항]
신대응은 1789년(정조 13) 상주 장천에서 태어났다. 1819년(순조 19)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1820년 승정원가주서가 되었다. 1823년 음죽현감을 거쳐 기린도찰방으로 부임하였고, 1827년 성균관전적·종부시주부를 역임하였다. 이후 부사과·경기도도사·사헌부장령·부사직·종부시정을 거쳐 1837년(헌종 3) 고성현령으로 나아갔다.
신대응은 고성현령으로 재직 중이던 1838년 아버지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가 1841년 삼년상을 치른 뒤 좌통례로 관직에 복귀하였다. 1845년 종부시주부가 되었고, 1846년 종부시정으로 있으면서 찬수감인교정관으로 공을 세워 통정대부에 가자되었다. 1847년 병조참의에 제수되었고, 현릉위안제헌관(顯陵慰安祭獻官)을 맡았다가 제례 시간에 늦게 나왔다는 이유로 전라도 보성군에 정배(定配)되었다. 1848년 유배에서 풀려난 후 부호군에 제수되었고, 1849년 가선대부에 가자되고 호군이 되었다.
신대응은 1850년(철종 1) 한성부좌윤을 거쳐 1851년에 병조참판이 되었고, 이후 좌승지·부총관·남양부사·행호군을 역임한 뒤 1863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신대응의 저술로는 유고인 『화석집(華石集)』이 있다.
[묘소]
신대응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노곡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