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8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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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命龍 |
영어공식명칭 | Jeon Myeongryong |
이칭/별칭 | 백유(伯兪),영서(穎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순한 |
[정의]
조선 후기 상주 출신의 문신.
[가계]
전명룡(全命龍)[1606~1667]의 본관은 옥천(沃川)이며, 자는 백유(伯兪), 호는 영서(𤃡西)이다. 아버지는 유학 전대승(全大承)이고, 어머니는 부호군 박운(朴雲)의 딸 함양 박씨(咸陽 朴氏)이다. 부인은 고인계(高仁繼)의 딸 개성 고씨(開城 高氏)이다.
[활동 사항]
전명룡은 1606년(선조 39) 상주에서 태어나 작은아버지 전중승(全仲承)에게 학문을 배웠다. 1624년(인조 2)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27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30년 성균관학정 겸 봉상시봉사에 임명되었고, 성균관박사 겸 양현고직장·성균관전적·형조좌랑을 거쳐 1933년 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이후 흥덕현감으로 재직 중에는 어사 심동구(沈東龜)가 전명룡의 선정을 조정에 보고하여 인조로부터 의복 한 벌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전명룡은 1640년 경상도판관으로 재임 중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상주에 머무르다가 1643년 경성판관에 제수되었고, 1647년 평양서윤으로 부임하였다. 1650년(효종 1) 흥양현감, 1654년 자인현감, 1659년 풍기군수·영암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영암군수로 재직 중 흉년이 들어 진곡(賑穀)을 대동미(大同米)로 변통한 일이 문제가 되어 어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이후 1662년(현종 3) 울산부사에 임명되어 관직에 복귀하였고, 1665년 영해부사로 재임 중에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때 접수된 부의금을 관비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전명룡은 1667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전명룡의 저술로는 문집인 『영서집(穎西集)』 4권 2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