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8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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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湜 |
영어공식명칭 | Jeon Sik |
이칭/별칭 | 정원(淨遠),사서(沙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순한 |
출생 시기/일시 | 1563년 - 전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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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9년 - 전식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전식 강주와 함께 창의하여 전공을 세움 |
활동 시기/일시 | 1596년 - 전식 연원도찰방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3년 - 전식 식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14년 - 전식 전라도도사 재임 중 사직하고 낙향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전식 사헌부장령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전식 사헌부집의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25년 - 전식 형조참의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전식 대사간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1년 - 전식 경주부윤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34년 - 전식 예조참의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8년 - 전식 사헌부대사헌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42년 - 전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43년 - 전식 좌찬성 증직 |
추모 시기/일시 | 1646년 - 전식 좌의정 증직 |
추모 시기/일시 | 1691년 - 전식 충간(忠簡) 시호를 하사받음 |
추모 시기/일시 | 1714년 - 전식 상주 옥동서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765년 - 전식 옥천 목담서원 배향 |
출생지 | 상주 - 경상도 상주시 |
거주|이주지 | 관동리 -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관동리 |
묘소|단소 | 전식 묘소 - 경상북도 상주시 외답동 산24-1 |
사당|배향지 |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546 |
사당|배향지 | 목담서원 -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옥천동이로 788-28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옥천(沃川) |
대표 관직 | 대사헌 |
[정의]
조선 후기 상주 출신의 문신.
[가계]
전식(全湜)[1563~1642]의 본관은 옥천(沃川)이며,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상주목사 전팽령(全彭齡)이고, 할아버지는 전혼(全焜)이다. 아버지는 전여림(全汝霖)이고, 어머니는 참봉 이신(李信)의 딸 월성 이씨(月城 李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최사립(崔斯立)의 딸 강화 최씨(江華 崔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홍천서(洪天敍)의 딸 남양 홍씨(南陽 洪氏)이다. 아들은 전극항(全克恒)·전극념(全克恬)이다.
[활동 사항]
전식은 1563년(명종 18) 1월 21일 상주에서 태어나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강주(姜霔)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토벌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김응남(金應南)의 천거로 연원도찰방이 되었다. 1603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전적·예조좌랑·예조정랑·울산판관 등을 역임하였고, 1614년(광해군 6) 전라도도사 재임 중 사직한 뒤 상주로 낙향하였다. 전식은 상주에 머무르는 동안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과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두루 다니며 학문적 교류에 힘썼다. 사람들은 전식·정경세·이준을 일컬어 상산삼노(商山三老)라 불렀다.
전식은 인조반정 이후 예조정랑에 제수되어 관직에 복귀하였고, 홍문관교리·성균관전적·성균관직강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임금을 모시고 무사히 천안으로 피난하여 사헌부집의에 제수되었다. 1625년 형조참의에 제수되었고, 동지사로 명나라 사행을 다녀온 뒤 약 9개월간의 여정을 『사행록(槎行錄)』에 상세히 기록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식은 어가를 호종하였고, 조정에서 화의를 의논하자 화의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정묘호란이 끝난 후에는 예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1631년에는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였고, 1634년 다시 예조참의에 제수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식은 의병 천여 명과 곡식을 모아 충주 노동(櫓洞)에 주둔하였고, 1637년 1월에는 문경에 진을 치고 길목을 지켜 지역을 보존하였다. 전식은 공이 인정되어 부제학과 이조참의에 이어 이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귀향하였다. 1638년에는 대사헌·예조참판·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때 전식은 왕에게 8조차자(八條箚子)를 올려 진언하였다. 8조차자 진언의 내용은 임금의 몸을 보살필 것[調養聖躬]과 사치 풍조를 혁파할 것[革侈風], 참된 덕을 힘써 닦을 것[懋修實德], 언로를 넓게 할 것[廣言路], 기강을 바로잡을 것[振紀綱] 등이었다. 전식은 이후 여러 번 관직이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지금의 상주시 외서면 관동리에 머물다가 1642년 11월 27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전식의 저술로는 문집인 『사서집(沙西集)』 10권 5책이 있다.
[묘소]
전식의 묘소는 상주시 외답동 산24-1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전식은 1642년 의정부좌찬성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추증되었다. 1646년에는 아들 전극항이 원종공신에 책봉됨에 따라 좌의정에 증직되었고, 1691년(숙종 17)에는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1714년 상주 옥동서원에 배향되었고, 1765년에는 옥천 목담서원(鶩譚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