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8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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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經世 |
영어공식명칭 | Jeong Gyeongse |
이칭/별칭 | 경임(景任),우복(愚伏),일묵(一默),하거(河渠),송록(松麓),승성자(乘成子),석총도인(石潨道人),문숙(文肅),문장(文莊)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석현 |
출생 시기/일시 | 1563년 - 정경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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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2년 - 정경세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586년 - 정경세 알성시 문과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정경세 성균관전적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4년 - 정경세 병조좌랑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 - 정경세 동부승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8년 - 정경세 경상도관찰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2년 - 정경세 예조참의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7년 - 정경세 대구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09년 - 정경세 동지사로 명나라 사행 |
활동 시기/일시 | 1610년 - 정경세 전라도관찰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16년 - 정경세 파직 및 낙향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정경세 홍문관부제학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정경세 영남호소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29년 - 정경세 이조판서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1년 - 정경세 좌참찬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33년 - 정경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33년 - 정경세 좌찬성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635년 - 정경세 상주 도남서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660년 - 정경세 문숙(文肅) 시호를 하사받음 |
추모 시기/일시 | 1693년 - 정경세 문장(文莊)으로 시호를 고침 |
추모 시기/일시 | 1706년 - 정경세 대구 연경서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796년 - 정경세 상주 우산서원 배향 |
출생지 | 율리촌 -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율리 |
부임|활동지 | 대구부 - 대구광역시 |
부임|활동지 | 나주목 - 전라남도 나주시 |
묘소|단소 | 정경세 묘소 -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부곡리 산53-1 |
사당|배향지 | 도남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도남2길 91[도남동 175-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진양(晉陽) |
대표 관직 | 홍문관부제학 |
[정의]
조선 후기 상주 출신의 문신.
[가계]
정경세(鄭經世)[1563~1633]의 본관은 진양(晉陽)이며,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일묵(一默)·하거(河渠)·송록(松麓)·승성자(乘成子)·석총도인(石潨道人)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계함(鄭繼咸)이고, 할아버지는 정은성(鄭銀成)이다. 아버지는 정여관(鄭汝寬)이고, 어머니는 이가(李軻)의 딸 합천 이씨(陜川 李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이해(李海)의 딸 전의 이씨(全義 李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이결(李潔)의 딸 진성 이씨(眞城 李氏)이다. 아들은 정심(鄭杺)·정학(鄭木+學)·정력(鄭木+樂)이고, 사위는 송준길(宋浚吉)이다.
[활동 사항]
정경세는 1563년(명종 18) 경상도 상주목 율리촌[현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집안 어른에게 글을 배웠고, 1580년(선조 13) 상주목사로 부임한 류성룡(柳成龍)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582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상주 출신인 이전(李㙉)·이준(李埈)·강응철(康應哲)·전식(全湜)을 비롯하여 이원익(李元翼)·김장생(金長生)·한준겸(韓浚謙) 등과 교유하였다.
정경세는 1586년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승문원부정자·예문관검열 등을 역임한 뒤 1589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92년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 병조좌랑이 되었고, 이후 홍문관교리·이조정랑을 거쳐 1597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1598년에는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어 영남 지역의 전쟁 피해를 수습하였다. 이 무렵 상주 지역의 유생들과 함께 사족들의 모임인 낙사계(洛社稧)를 조직하고 의료 기관인 존애원(存愛院)을 건립하였으며, 상주 최초의 서원인 도남서원(道南書院) 창건에 앞장섰다. 1602년 예조참의를 거쳐 1607년 대구부사로 부임하였고, 1609년에는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0년 성균관대사성·나주목사·전라도관찰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과 대립하며 해직되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서 무고를 당하여 체포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났고, 1615년 심경(沈憬)의 옥사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다가 1616년 파직된 후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정경세는 홍문관부제학에 제수되어 다시 관직에 진출한 뒤 도승지·형조판서·사헌부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후금(後金)이 침략하자 영남호소사를 맡아 군사를 모았고, 1629년에는 이조판서와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1631년 좌참찬에 제수되었고, 1633년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경세의 저술로는 문집인 『우복집(愚伏集)』을 비롯하여 『주문작해(朱文酌海)』, 『상례참고(喪禮參考)』 등이 있다. 류성룡의 문인으로 퇴계학맥(退溪學脈)을 계승하였으며, 17세기 초반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학문이 뛰어나 인조 대 경연을 주도하였다.
[묘소]
정경세의 묘소는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부곡리에 있다. 주변에 조경(趙絅)이 짓고 이동표(李東標)가 쓴 우복정경세신도비(愚伏鄭經世神道碑)가 있다.
[상훈과 추모]
정경세는 1633년 7월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1635년 지금의 상주시 도남2길 91[도남동 175-1]에 있는 도남서원(道南書院)에 배향되었다. 1660년(현종 1)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고, 1693년 상주 지역 유림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문장(文莊)으로 시호를 고쳤다. 1706년(숙종 32) 대구 연경서원(硏經書院), 1796년(정조 20) 상주 우산서원(愚山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