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0953
한자 姜東錫
영어공식명칭 Kang Dong-seok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신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8년 8월 25일연표보기 - 강동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43년 8월~1945년 3월 - 강동석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99년 8월 15일연표보기 - 강동석 대통령 표창 수상
몰년 시기/일시 2004년 4월 14일연표보기 - 강동석 사망
거주|이주지 낙양동 - 경상북도 상주시 낙양동 지도보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조선독립회복연구단 단원

[정의]

일제 강점기 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강동석(姜東錫)[1928~2004]의 본적지는 경상북도 상주시 낙양동 일대이다.

[활동 사항]

강동석은 1928년 8월 25일 태어났다. 강동석은 안동농림학교 학생이었는데, 1943년 가을 무렵 모임을 시작한 안동의 조선독립회복연구단(朝鮮獨立恢復硏究團)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독립회복연구단은 조선의 독립을 기필코 회복하자는 의지와 청년 학도들이 조선 독립의 방법을 연구하여 실행하자는 의지로 결성한 비밀결사 단체이다.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비밀결사를 조직한 배경에는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도 있지만, 군사동원에 대한 위기감도 있었다. 1943년 실시된 징병제의 징집 연령이 만 20세였고, 학도 지원병제가 1943년 10월 공포되고 1944년 1월 시행되어 학생들을 더욱 압박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당시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은 방학 중에도 대구 동촌비행장의 확장 공사에 강제로 동원되었다.

이에 강동석을 비롯한 안동농림학교의 제8·9·10회생들은 일제의 부당한 식민지 통치에 항거하기 위하여 비밀결사 조선독립회복연구단을 조직하였고,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참가하여 총 51명이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단원들은 헌병 파견대와 안동경찰서 장악, 교통·통신 두절을 위하여 권투와 유도 등 격투기 훈련과 전신주를 타고 올라가 통신을 절단하는 훈련 등을 하였다.

1945년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군사동원 정책에 따라 안동농림학교 9회생의 수업 연한이 1년이나 단축되었다. 이에 강동석 등 9회생들은 3월 23일 졸업이 예정되었으며, 졸업하기 전인 3월 10일 일본 육군기념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실행 준비에 들어갔다. 단원 중 현필기와 강순원은 미국 선교사 사택에서 영문 서적을 가져오다 옥동파출소 순사의 불심 검문에 걸렸고, 현필기 집을 압수 수색하던 중에 혐의가 포착되었다. 그렇게 황해도경·경북도경·안동경찰서의 합동수사로 조선독립회복연구단의 거사 계획이 드러났고, 강동석을 비롯한 단원 전원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강동석은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다른 단원들은 광복을 맞이하여 1945년 8월 16일 출옥하였다.

강동석은 2004년 4월 14일 대구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묘소]

강동석의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강동석의 공적을 기려 1999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