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0561
한자 日帝 强占期
영어공식명칭 Japanese Colonial Period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정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경상북도 상주 지역의 역사.

[개설]

우리 민족은 1910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대한제국이 패망한 이후 한국이 독립하는 1945년 8월까지 36년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는 1910년대 무단 폭압 정치기, 1920년대 이른바 문화 정치기, 1930년 이후 1945년 8월까지 일본 군국주의의 전시 체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대하여 사회·경제적 수탈과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우리 민족은 민족 해방과 근대 국가를 목표로 투쟁하였다.

[행정 구역 개편]

일제 강점기 1914년 3월 1일 전국의 지방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22개 면이었던 상주군은 15개 면으로 조정되었다. 함창군 소속이었던 7개 면이 3개 면으로 통합되어 상주군으로 편입되었다. 이리하여 상주군은 18개 면 237개 리로 행정 구역이 정비되었다. 1917년 6월 면제(面制)가 공포되면서 각 면에서 교육 업무를 제외한 모든 식민 통치 업무를 처리하였다. 1931년 4월 1일 읍면제가 실시되면서 상주면이 상주읍으로 승격되어, 1읍 17개 면으로 정비되었다.

[사법과 치안 행정]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 공포 후 조선총독부 관제가 실시되면서 상주에는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이 설치되었다.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은 상주를 비롯한 문경과 예천 3개 군 2개 읍 38개 면의 사법 업무를 관장하였다. 대구지방검찰청 상주지청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리하여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은 상주·문경·예천 지역을 관할하는 식민 통치의 중추적 기관이 되었다.

치안 행정은 헌병 경찰 제도에 의거하여 상주경찰서가 담당하였다. 대한 제국기 1908년 8월 지방 관제 개편으로 상주군에는 헌병분견소가 설치되었고, 상주군 낙동·공성·함창면은 헌병분견소 출장소, 화서·화북면은 상주헌병분견소가 관할하였다. 1919년 헌병 경찰 제도가 폐지되고 보통 경찰 제도가 실시되면서 상주헌병분견소에는 상주경찰서가 설치되었고, 상주헌병분견소 출장소는 경찰관 주재소가 되었다. 이리하여 상주경찰서와 각 면 주재소는 식민지 통치의 전위대가 되었다.

[교육]

대한 제국기 학부 인가의 근대적 교육기관은 전국적으로 2,200개 교를 상회하였다. 상주 지역에는 1906년 설립된 사립 광흥학교(廣興學校), 1908년 설립된 사립 풍창학교(豊昌學校), 1909년 설립된 남명학교(南明學校), 그리고 함창에 설립된 창명학교(昌明學校) 등이 있었다. 그러나 1908년 공포된 「사립학교령」에 따라 모두 폐교되었다.

상주 지역에는 1907년 상주공립보통학교[현 상주초등학교]가 설립된 이후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1910년 함창공립보통학교[현 함창초등학교], 1920년 옥산공립보통학교[현 옥산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1922년부터 각 면 지역에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에 따라 보통학교가 소학교로 개칭되었다. 1941년 소학교가 국민학교로 개편되었으며, 1996년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편, 실업학교로 1921년 상주공립농잠학교[현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 1945년 5월 상주공립실과여학교가 설립되었는데, 해방 후 각각 상주중학교상주여자중학교로 개편되었다. 간이학교로는 공립보통학교 부설의 용화·용포·두릉·정산간이학교 등 4개 학교가 1930년대에 설립되었다. 사설 강습소로는 1920년 조명강습소(朝明講習所), 1923년 사립대성강습회(私立大成講習會), 1921년 사립보광강습소(私立普光講習所), 1920년 사립보명학원(私立普明學院), 1922년 자양강습소(紫陽講習所), 1920년 장암강습소(壯岩講習所) 등이 설립되었다.

[농업과 잠업]

일제 강점기 상주는 낙동강 중류의 넓고 비옥한 평야 지대에 있어서 미곡과 맥류 생산의 중심지였다. 생산량은 연간 30만 석 정도로 경상북도 총생산량의 35%에 해당하였다. 상주는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잠업 지대이기도 하여, 일본 수출품 중 생사(生絲)를 생산하였다. 양잠업으로 전국에 명성이 높았으며, 1920년대 상주에서 양잠 호수는 1만여 호에 달할 정도였다. 특히 함창에서는 1927년 양잠 조합이 결성되었고, 1931년 함창에서 생산된 명주는 함창견(咸昌絹)으로 이름이 높았다.

[독립운동]

상주 지역에서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여 치열한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하 독립운동은 1910년대 무단 폭압 통치기, 1919년 3·1 운동기, 1920년대 소위 ‘문화 정치’기, 1930~1940년대 전시 체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910년대 무단 폭압 통치하의 독립운동은 대한 제국기 국권 회복 운동으로서 의병 전쟁과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의 풍기광복단과 민단조합, 그리고 광복회 활동이 주목된다. 특히 상주 출신 채기중은 풍기광복단의 결성과 광복회 결성 및 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상주 지역에서는 3월 23일 상주 장터 만세시위운동, 3월 29일 상주군 이안면 소암리 만세시위운동, 4월 4일부터 8일까지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 만세시위운동 등이 벌어졌다.

이후 1920년대 소위 ‘문화 정치’하에서도 독립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서로군정서 무관학교 생도 모집 사건은 1919년 6월 선산 출신의 최재화(崔載華)가 주도하고, 상주 출신 조성순(趙誠淳)·류우국(柳佑國)·조태연(趙台衍)이 연루된 사건이다. 1922년 상주 출신 김규현(金奎憲)과 김재명(金在明)이 참여한 의용단 군자금 모집 사건, 1923년 상주 출신 김사용(金思容)이 연루된 의열단 폭탄 반입 사건, 1920년 3월 상주 출신 김재수(金在洙)가 연루된 밀양 총기 폭탄 사건 등이 전개되었다. 그 외 1919년 8월 워싱턴회의 독립청원서 사건, 1919년 10월 중국 지폐 위조 사건, 1925년 4월 류우국의 다물단(多勿團) 사건 등이 있다. 나아가 1929년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 출신 박열(朴烈)이 일본 국왕을 살해하려 하였던 소위 ‘대역사건(大逆事件)’은 무정부주의 항일 독립운동으로 주목된다.

1930~1940년대 전시 체제하에서 독립운동은 1943년 8월 안동공립농림학교 재학 중이던 상주 출신 강동석(姜東錫)이 참여하였던 조선회복연구단 사건, 1944년 상주 출신 성익환(成益煥)이 참여하였던 흑백당(黑白黨) 사건 등으로 나타났다. 한편, 1944년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일본군에 배치되었다가 탈출하여 광복군에 투신한 상주 출신 김길상(金吉相), 김만식(金萬植), 김영이(金榮伊), 박하규(朴夏圭), 이창재(李昌宰), 한상렬(韓相烈) 등의 활동도 주목된다.

[사회운동]

1920년대에는 학생·여성·청년·노동·농민 운동 등 사회 운동이 한층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상주 지역에서 청년 운동과 학생 운동, 그리고 여성 운동은 항일 운동의 전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 이후 상주청년회를 비롯하여 모두 24개의 청년 운동 단체가 결성되어 강연회, 토론회, 체육 활동, 오락 활동, 사회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상주청년회는 1925년 8월 예천의 형평분사가 습격받은 반형평사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 대책을 강구하여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외 여성 운동으로는 1926년 10월 창립된 상주여자기독청년회가 주목된다. 신간회운동은 1928년 신간회 상주지회가 설립되어 전 민족 실력양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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