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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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年 運動 |
영어공식명칭 | The Youth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경상북도 상주에서 청년을 중심으로 전개된 대중 운동.
[청년 운동의 발생과 변화]
‘청년’은 특정한 계급이나 신분을 의미하는 범주화된 집단은 아니며, 일정한 범위에 속하는 연령층을 뜻한다. 생물학적 세대의 특성을 가진 청년이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대중 운동의 주체로 부각되며 전개된 것이 ‘청년 운동’이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 청년 운동이 본격적으로 발생한 때는 3·1 운동 이후였고,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국 각지에서 지식인층과 지역 유지들이 주도하는 청년 단체가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졌다.
1920년대 초반 청년 운동은 봉건 질서 타파와 근대성 함양을 목표로 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3월 조선청년당대회를 계기로 청년 운동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화되어 갔다. 조선청년당대회에서는 민족·경제·교육·종교·노동 문제를 비롯하여 여성·청년 문제 등이 논의되고, 구체적 실현 방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1920년대 중반 청년 운동은 대중 운동에서 청년 운동의 선도를 강조하는 활동을 벌였다. 특히, 1924년 청년 운동의 전국적 조직인 조선청년총동맹이 창립되면서, 청년 운동에서 계급성이 강조되었다. 특히, 청년 운동은 농민·노동자를 비롯한 대중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1920년대 후반 청년 운동은 ‘전 민족적 청년 운동’을 새로운 방침으로 제시하였다. 이에 청년 운동은 계급성을 탈피하여 민족 협동 전선 형태의 신간회 운동을 지지하고, 각 군과 부에 산재한 청년 단체를 지양하여 군을 단위로 한 통일 지도 기관의 성격을 지닌 청년동맹을 결성하여 나갔다. 청년동맹은 군 청년동맹을 기반으로 도 단위 청년 조직의 결성에 나서 군(부)청년동맹-도연맹-조선청년총동맹이라는 통일적·전국적 청년 운동 기관을 전망하였다.
[상주의 1920년대 전반 청년운동]
경상북도 상주에서는 청년 운동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빨리 시작되었다. 1920년 4월 11일에 함창청년회(咸昌靑年會)가 창립되어 상주 청년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함창청년회의 회원은 60여 명 정도였다. 이어 1920년 11월 2일 상주청년회가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 상주청년회의 회원은 무려 300여 명 정도나 되었다. 1921년에는 옥산청년회(玉山靑年會)와 상주여자기독청년회가 창립되었다. 상주기독청년회 역시 1921년 즈음에 창립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23년 3월 서울에서 열린 조선청년당대회에 상주에서는 상주청년회와 상주여자기독청년회가 참가하였다.
1925년 청년 운동을 비롯한 조선 사회 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사회주의 계열 내부에서 갈등이 빚어지는 가운데 상주의 상주청년회, 옥산청년회, 함창청년회, 상주새모임 등은 1925년 4월에 열릴 예정인 전조선민중운동대회 대회에 반대하는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 창립 이후 조선청년총동맹의 청년 운동 조직 방침에 따라 상주에서는 1925년 10월 상주청년연맹이 결성되었다. 상주청년연맹에는 상주청년회를 비롯하여 상주노동청년회와 연봉청년회 등이 참가 단체로 참여하였다. 또한 1926년에도 상주에서는 상주독서회[1월], 상주 적극단[4월], 상주무산청년회[5월] 등이 속속 결성되었다.
1920년대 중반 상주의 청년 단체들은 ‘혁신총회’를 통하여 ‘민중 해방과 신사회 건설을 위한 사회적 역할’을 청년 운동의 역할과 임무로 설정하였다. 그에 따라 상주의 청년 운동 단체들은 문화 운동의 실행 기관에서 식민지 사회의 민중 운동과 해방 운동의 선도 기관으로 전환하여 나갔다.
[상주의 1920년대 후반 청년운동]
1927년 조선청년동맹이 새로운 운동 방침으로 ‘전 민족적 청년 운동’을 제시하자 상주에서는 신간회 지회 설립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1927년 9월 4일 신간회 상주지회가 설립될 수 있었다. 또 1927년 10월 5일 상주 청년운동 세력은 상주청년연맹을 해체하고, 상주군의 단일 청년 운동의 지도 기관으로 상주청년동맹을 창립하였다.
상주청년동맹에는 상주청년회, 옥산청년회, 연봉청년회, 중모청년회, 함창청년회, 연원청년회, 청리청년회 등이 참여하였고, 각 청년 단체는 상주청년동맹의 지회로 전환하였다. 그런데 상주청년동맹의 주요 구성원들은 1927년 11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열린 경북공산당대회[도간부회]에 참여하고, 플랙션[프락치] 및 야체이카[세포조직]가 되었다. 플랙션으로는 강훈, 야체이카로는 최상돈·강용수·신영철 등이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26일 상주청년동맹의 일부는 서울에서 경성청년회의 운동 방침이 제기되자 상주청년동맹을 해체를 시도하고, 조선청년총동맹 상주군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조선청년총동맹 상주군위원회 조직의 명분은 “단일 동맹체를 해체하고 노력 청년의 계급적 강령과 프로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의 원칙에 의하여 확립된 표식과 건전한 조직체로서 청총상주군위원회를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조선청년총동맹 상주군위원회의 존폐를 둘러싸고 첨예한 갈등이 발생하였다.
상주의 청년 운동은 1928년 12월 이후 조선 사회 운동의 노선 변화와 일제의 사회 운동 탄압에 따라 활동력이 점차 약화되는 가운데 193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과 혁명적 대중 운동의 방침에 따라 활동을 이어 나갔다.
[의의와 평가]
상주의 청년 운동은 3·1 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10월에 조직된 상주청년구락부에서 시작되어 조선의 민족 운동 방침이 변화되던 1930년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조선 청년 운동의 흐름과 노선에 맞게 충실히 전개되었다. 즉, 상주의 청년 운동은 1920년대 전반 문화 운동에서 1920년대 중반 대중 운동의 선도성을 강조하는 청년 운동으로 전환하고, 1920년대 후반 다시 ‘전 민족적 청년 운동’의 방침에 맞게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물론, 1928년 3월 조선청년총동맹 상주군위원회처럼 독특한 노선을 표방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상주의 청년 운동은 상주를 기반으로 경상북도 지역, 나아가 조선 전체의 대중 운동과 사회 운동, 민족 운동의 고양에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