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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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尙州靑年聯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설립 시기/일시 | 1925년 10월 15일 - 상주청년연맹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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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27년 10월 5일 - 상주청년연맹 해체 |
최초 설립지 | 상주청년회관 - 경상북도 상주시 |
성격 | 청년 운동 단체 |
설립자 | 김한익|소한옥|정기섭|석형목|김억주|지경재|박순|박인옥|장재권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 있던 대표적 청년 운동 조직.
[개설]
상주청년연맹(尙州靑年聯盟)은 1925년 10월 상주청년회를 중심으로 함창청년회, 옥산청년회 등이 참여한 가운데 창립되었다. 창립 후 상주노동청년회와 연봉청년회가 새로이 상주청년연맹에 가입하였다. 이로써 상주청년연맹은 1920년대 중반 경상북도 상주군의 대표적 청년 단체로 상주를 비롯한 경상북도 나아가 전국 차원에서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상주청년연맹은 1927년 10월 해체 때까지 상주군의 대표적 청년 운동 조직이었다.
[설립 목적]
상주청년연맹은 1924년에 창립된 조선청년총동맹의 조직 방침에 따라 상주군 청년 운동의 대동단결과 단일한 지도 기관을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변천]
상주청년연맹은 1925년 10월 15일 창립되었으며, 1927년 10월 5일 조선청년총동맹의 조직 방침에 따라 연맹을 해체하고 경상북도 상주군 내 단일한 청년 조직으로 창립된 상주청년동맹으로 계승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상주청년연맹의 창립은 1925년 9월에 열린 상주청년회의 임시 총회를 계기로 이루어졌다. 상주청년회는 1925년 10월 11일 상주청년회관에서 함창청년회·옥산청년회 등과 함께 상주청년연맹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발기회 결의 사항은 첫째, 가맹 단체 자격은 남녀 청년 단체에 한함, 둘째, 가맹 단체 대표자는 매 단체 2인 이상으로 할 것, 셋째, 창립 총회 및 발회식은 10월 10일 오전 10시로 할 것, 넷째, 준비사무소는 상주청년회로 할 것 등이었다. 발기회에서는 상주청년연맹 결성을 위한 준비위원으로 김억주(金億周), 지경재(池璟宰), 박순(朴淳), 박인옥(朴寅玉), 김대복(金大福) 등을 선출하였다.
1925년 10월 15일 상주청년회관에서 이루어진 상주청년연맹 창립 대회는 상주경찰서의 지나친 간섭으로 순서대로 대회를 진행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선언과 결의, 토의까지 금지당하였다. 집행위원으로 김한익(金漢翊), 소한옥(蘇漢玉), 정기섭(鄭基燮), 석형목(石灐穆), 김억주(金億周), 지경재(池璟宰), 박순(朴淳), 박인옥(朴寅玉), 장재권(張在權) 등을 선출하였다. 상무위원으로 서무부에 박순, 교양부에 지경재, 조사부에 김한익, 조직부에 정기섭을 선임하였다.
1925년 10월 15일 상주청년회관에서 상주청년연맹은 각 가맹 단체 상황 보고와 경상북도연맹에 관한 건을 결의하였다. 상주청년연맹의 창립과 동시에 경상북도의 안동, 예천, 김천 등지에서 청년연맹이 결성된 것을 기반으로 하여 경북청년연맹을 조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25년 12월 5일 상주청년연맹은 함창청년회 임시사무소에서 제3회 집행위원회를 열고 강령과 결의 사항을 채택하였다. 상주청년연맹의 강령은 첫째, 대중 해방을 목표로 함, 둘째, 교양 운동에 치중할 일, 셋째, 상호부조와 단결을 도모할 일 등이었다. 결의 사항으로는 경상북도연맹 기성위원회 소집, 상주군 내 가맹 단체의 강령·규약을 상주청년연맹 강령에 의하여 통일케 할 것, 회람문고 설치, 청년단 조직에 관한 것 등이었다. 또한 상주청년연맹은 가맹 단체를 순회하며 위원회를 열었다. 2025년 12월에 새롭게 결성된 상주노동청년회와 연봉청년회도 상주청년연맹에 가맹하였다.
1926년 1월 상주청년연맹은 신년을 맞아 상주군 청년운동자 신년 연회를 열었다. 2026년 1월 8일 상주노동청년회의 창립 대회에 상주청년연맹의 지경재와 박철(朴哲) 등이 대표로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1925년 3월 상주청년회관에서 상주청년연맹은 제1회 정기 총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 참석한 가맹 단체는 상주청년회, 함창청년회, 연봉청년회, 옥산청년회, 상주노동청년회 등이었다. 제1회 정기총회에서 결의된 사항은 첫째, 조직 문제에 관한 건이었다. 구체적으로 본 연맹에 가맹하지 않은 단체의 조속한 가맹, 지역적 농촌 청년 단체의 조직, 군연맹 단위로 중앙총연맹을 조직하고 도연맹 단위 중앙총연맹을 조직하여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를 확립할 것 등이었다. 둘째, 교양 문제에 관한 건, 셋째, 이류 청년 단체에 관한 건, 넷째 회원 문제에 관한 건 등이었다.
상주청년연맹은 1927년 3월 27일 상주청년회관에서 제3회 정기 대회를 열고, 조선청년총동맹 분규 문제와 신간회 운동에 찬성의 뜻을 표하였다. 또 기관지 발간 등을 결의하였다. 상주청년연맹은 1927년 10월 연맹을 해체하고 상주청년동맹을 결성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의의와 평가]
상주청년연맹은 상주의 개별적 청년 단체를 상주청년연맹으로 모음으로써 군 단위의 단일한 지도 기관으로서의 위상을 가졌다. 또한 상주청년연맹은 청년 대중의 교양과 단결을 꾀하고 경북 지역 청년 운동의 단일한 지도 기관의 결성, 나아가 노동·농민 운동, 여성 운동과 형평 운동 등 다양한 대중 운동과의 연대를 지향하였다. 이로써 상주청년연맹은 1920년대 중반 청년 운동의 확산과 강화에 기여하고, 1920년대 후반 사회 운동과 민족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