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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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運動 |
영어공식명칭 | The March 1st Movement |
이칭/별칭 | 상주 만세시위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한준호 |
[정의]
1919년 민족 독립 쟁취를 위하여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개설]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는 1919년 3월 23일부터 4월 9일까지 상주 장터, 이안면 소암리, 화북면 장암리와 운흥리 일대에서 3·1 운동이 전개되었다.
[배경]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 운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경상북도에서는 3월 8일 대구에서 시작되어 5월 7일 청도까지 약 61일간 전개되었는데, 「독립선언서」의 전달, 고종 국장 참례 인사들의 귀향, 언론 통제의 해금(解禁)을 통한 언론 보도, 유학생 등 학생들의 활동 등을 통하여 3·1 운동이 전파되었다. 당시 상주 지역에서는 3월 23일 상주 장터에서 한암회(韓岩回)의 주도로 첫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어 3월 29일에는 이안면 소암리에서, 그리고 4월 8일과 9일에는 화북면 문장산과 운흥리에서 각각 일어났다.
[경과]
상주에서는 1919년 3월 23일 상주 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났다. 상주 장터 만세시위운동은 한암회를 비롯한 강용석(姜龍錫), 조월연(趙月衍), 성필환(成必煥), 성해식(成海植), 석성기(石盛基) 등 서울 유학생과 상주 지역 학생들이 주도하였다. 3월 23일 오후 5시 30분경 먼저 한암회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시장의 군중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6시 40분경 성해식이 약 300명의 군중을 향하여 “나는 천한 사람이기는 하나, 이번에 조선이 독립한다 하니 제군과 함께 만세를 부르기로 한다”라고 말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3번 선창하였다. 이에 시장에 있던 군중과 학생이 적극적으로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일본군 헌병의 강압적인 진압에도 불구하고 밤이 되어서야 해산하였다. 한암회를 비롯하여 만세시위운동 주도자 5명 등은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다.
상주 장터 만세시위운동 6일 후인 3월 29일 채세현(蔡世鉉)·채순만(蔡淳萬) 등이 이안면 소암리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채세현 등은 소암리 동성마을의 유지였는데, 청년 20여 명을 이끌고 3월 29일 밤 10시경 마을 남쪽의 제방 위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여러 차례 부른 뒤 스스로 해산하였다. 주도자 채세현과 채순만은 1919년 5월 1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다.
이어서 화북면 장암리와 운흥리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 8일에는 화북면 장암리에서 구장(區長) 이성범(李聖範)과 같은 마을의 김재갑(金在甲)·홍종흠(洪鍾欽), 입석리의 이용회(李容晦) 등이 주도하였다. 이성범 등은 4월 4일 면내에 동참을 권하는 권유문을 보내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준비를 진행하였다. 4월 8일 오후 2시경 장암리 일신서당에 모인 이성범·김재갑·홍종흠·이용회 등은 마을 주민 100여 명과 함께 문장산에 올라 태극기를 세워 놓고 독립 만세를 외친 후 스스로 해산하였다. 이로 인하여 주도자 4명이 붙잡혔다. 다음 날인 4월 9일 정오 전성희(全聖熙)와 정양수(鄭良洙)는 마을 주민 약 100명과 함께 운흥리에 모여 태극기 10기를 만들어 흔들면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의의와 평가]
상주 지역의 3·1 운동은 전국적으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던 3월 하순부터 시작하여 4월 초순까지 일어났으며, 학생들과 마을 유지들이 주로 주도하였다. 한편, 마을 단위에서 권고문이나 통고문을 발송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알리고 참여를 유도한 것은 다른 지역에서 보기 드문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