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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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思容 |
영어공식명칭 | Kim Sa-yong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10월 7일 - 김사용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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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김사용 상산중학설립찬성회 사무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김사용 교남교육회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월 7일 - 김사용 조선노동자연구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4월 - 김사용 조선노동공제회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3월 - 김사용 의열단 폭탄 사건으로 투옥 |
몰년 시기/일시 | 1941년 9월 21일 - 김사용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8월 15일 - 김사용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인봉동 - 경상북도 상주시 인봉동 |
활동지 | 서울중앙기독교청년회관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조선노동공제회원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사용(金思容)[1883~1941]은 1883년 10월 7일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인봉동에서 태어났다. 1907년 조필연 등과 함께 상주 유림들이 전개한 상산중학설립찬성회(商山中學設立贊成會) 사무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08년 3월 조직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1909년 10월경 조직된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다수 인쇄 배포하다가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1월 7일 서울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김사용은 50여 명의 회원과 함께 발기인회를 열고 조선노동자연구회(朝鮮勞動者硏究會)를 조직하였다.
1920년 2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졸업생으로 조직된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과 연락하면서 김사용은 문상직·김춘배·서영균·송정덕·김용만·서상일 등과 함께 남만주에서 김동삼이 보낸 「대한민국임시정부 강령」, 「선포문」 등 독립운동 관련 문서를 배포하고, 폭탄으로 일제의 주요 관공서를 파괴하며 친일 매국노들을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체포되었다.
김사용은 1920년 4월에는 박중화·김명식·박이규 등과 함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에 참여하여 노동 운동을 지도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23년 3월에는 의열단의 김시현·황옥·유석현 등이 상하이에서 폭탄을 반입하여 일제 주요 기관들을 폭파하려고 한다는 연락을 받고, 폭탄 5개를 보관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사용은 1941년 9월 2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사용의 공적을 기려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