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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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萬伊 |
영어공식명칭 | An Man-i |
이칭/별칭 | 목동(木洞),해강(海崗),중일(重一),안종명(安鍾鳴),안응삼(安應三)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덕천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8월 28일 - 안만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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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6년 - 안만이 중국 동북 지역 망명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대 후반~1920년대 전반 - 안만이 독립군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월 31일 - 안만이 징역 6월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안만이 신민부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8월 23일 - 안만이 징역 1년 6월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대 전반 - 안만이 한국독립군 가담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안만이 쌍성보전투 참전 |
몰년 시기/일시 | 1934년 5월 1일 - 안만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8월 15일 - 안만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안용리 -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안용리 |
거주|이주지 | 상주시 - 경상북도 상주시 |
활동지 | 중국 - 중국 동북 지역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안만이(安萬伊)[1895~1934]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호는 목동(木洞)·해강(海崗)·중일(重一), 다른 이름은 안종명(安鍾鳴)·안응삼(安應三)이다. 아버지는 안정원(安正遠)이고, 어머니는 김화산(金華山)이다.
[활동 사항]
안만이는 1895년 8월 28일 경상북도 상주군 이안면 안용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하였다. 1916년 국내 활동을 접고 중국 동북 지역으로 망명한 후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체포되어 1921년 1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2년 3월 안만이는 재차 중국 동북 지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참의부에서 활동하다가 1925년 신민부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다시 체포되어 1926년 8월 23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화폐·지폐·은행권·증권의 위조·변조·모조권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안만이는 출옥 후 또다시 중국 동북 지역으로 망명하여 1920년대 후반까지 계속 신민부에서 활동하였다.
안만이는 1930년대 전반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였다. 1932년 3월 3일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중국의 ‘카오펑린[考鳳林] 부대’와 함께 중국 아청[阿城]에 도착하였다. 아청에서 일제와 이틀간 혈전을 벌여 아청을 점령하였다. 5월 3일에는 조경한(趙擎韓)·이규보(李圭輔) 등과 함께 아청현 영발둔(永發屯)에 있던 카오펑린 부대를 방문하여, 한중 연대 문제를 논의하였다. 9월에 이르러 안만이는 부대를 이끌고 카오펑린 부대에 합류하였다. 이후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에 참전하였다. 12월 일제의 하얼빈총영사관[哈爾濱總領事館]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금방 풀려났다. 그러나 1933년 5월 또다시 하얼빈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체류 금지를 당하였다. 9월 14일에는 봉천총영사관(奉天總領事館) 경찰에 체포되어, 평안북도 신의주부(新義州府)로 압송되었다. 얼마 후 풀려나 1934년 고향에서 요양을 하였으나 병이 악화되었다.
안만이는 1934년 5월 1일 사망하였다.
[묘소]
안만이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의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2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안만이의 공적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