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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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聖熙 |
영어공식명칭 | Jeon Seong-hui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한준호 |
출생 시기/일시 | 1873년 8월 13일 - 전성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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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9일 - 전성희 화북면 운흥리 만세시위운동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29년 9월 6일 - 전성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6년 8월 15일 - 전성희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84년 - 전성희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운흥리에 의사유적비 건립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4월 9일 - 화북면 운흥리 만세시위운동 시작 |
출생지 | 운흥리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운흥리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전성희(全聖熙)[1873~1929]의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활동 사항]
전성희는 1873년 8월 13일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운흥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8일 전성희는 화북면 중벌리에 사는 정양수(鄭良洙)와 함께 통고문 2통을 작성하고, 통고문을 2명으로 하여금 중벌리와 운흥리 마을 사람들에게 전파시켜 만세시위운동 계획을 알리는 한편 참가를 권유하였다. 이튿날인 4월 9일 정오 전성희는 정양수 등 약 100명과 함께 운흥리에 모여 태극기 10기를 만들어 흔들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급보를 받은 상주의 일본군 헌병 분대와 수비대에 의하여 전성희는 20명과 함께 붙잡혔다. 전성희는 1919년 5월 9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전성희는 1929년 9월 6일 사망하였다.
[묘소]
전성희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5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전성희의 공적을 기려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또 1984년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운흥리에 의사유적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