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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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台衍 |
영어공식명칭 | Cho Tae-yeon |
이칭/별칭 | 조학연(趙學衍),취삼(聚三),낙재(樂齋)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신진희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조태연(趙台衍)[1895~1945]의 아명은 조학연(趙學衍)이며, 자는 취삼(聚三), 호는 낙재(樂齋)이다. 아버지는 조남욱(趙南昱)이고, 아들은 조성철(趙誠轍)·조성식(趙誠軾)이다.
[활동 사항]
조태연은 1895년 5월 15일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조태연은 1915년 3월 서울에서 물산 장려를 통한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에 가입하였는데, 조선산직장려계는 주로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참여 인원은 130여 명에 이르렀다. 조태연은 조선산직장려계에서 활동하던 중 1917년 3월 「보안법」 위반으로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일제는 사건명을 ‘경성고보교원양성소내비밀결사(京城高普敎員養成所內祕密結社)’라고 불렀다.
조태연은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안동 출신으로 상주에 살고 있던 배승환(裵昇煥)에게 만주 신흥학교(新興學校)에 입학하기를 권유받았다. 이에 조태연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단둥현[安東縣]에 갔다가, 다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단둥현에서 병을 얻어 9월 국내로 돌아왔다. 귀국 후 조태연은 체포되었고, 1921년 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출감하였다.
이후 조태연은 1920년 4월 발기한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에서 노동운동을 펼쳤다. 1921년 3월에 열린 조선노동공제회 정기총회에서 대표자 61인 가운데 1인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조태연은 1945년 4월 1일 사망하였다.
[묘소]
조태연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조태연의 공적을 기려 2005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