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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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淵嶽書院 |
영어공식명칭 | Yeonak Confucian Academy, Sangju |
이칭/별칭 | 지천서당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지천1길 49[지천동 62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순한 |
건립 시기/일시 | 1553년 - 지천서당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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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870년 - 연악서원 훼철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658년 - 지천서당 강당 복원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4년 - 연악서원 강당 중건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7년 - 연악서원 묘우 복원 |
개축|증축 시기/일시 | 2005년 - 연악서원 중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702년 - 지천서당에서 연악서원으로 승원 |
현 소재지 | 연악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지천1길 49[지천동 628] |
성격 | 서원 |
양식 | 팔작지붕[강당]|맞배지붕[창덕사] |
정면 칸수 | 4칸[강당]|3칸[창덕사] |
측면 칸수 | 2칸[강당]|1칸[창덕사] |
관리자 | 연악서원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지천동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개설]
연악서원(淵嶽書院)은 박언성(朴彦誠), 김언건(金彦健)[1511~1571], 강응철(康應哲)[1562~1635], 김각(金覺)[1536~1610], 조광벽(趙光璧) [1566~1642], 강용량(康用良)[1608~1676]을 배향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박언성의 본관은 문의(文義), 호는 낙지정(樂志亭)이다. 박언성은 12세에 할머니 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쳤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도 사양할 정도로 효자였다. 김언건의 본관은 영산(永山), 자는 정보(精甫), 호는 운정(芸亭)이다. 김언건은 1624년(인조 2) 효행으로 읍민이 정표할 것을 청하여 감찰로 증직되었다. 강응철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명보(明甫), 호는 남계(南溪)이다. 강응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상주를 지켰고, 광해군의 폭정에 분개하여 은퇴하고 독서와 저술로 일생을 보냈다. 김각의 본관은 영산(永山), 자는 경성(景惺), 호는 석천(石川)이다. 김각은 김언건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과를 올렸다. 조광벽의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여완(汝完), 호는 북계(北溪)이다. 조광벽은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공훈을 세웠다. 강용량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과(慶過), 호는 와운(臥雲)이다. 강용량은 강응철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이후 의리를 지켜 공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위치]
연악서원은 경상북도 상주시 지천1길 49[지천동 628] 질구내마을에 있다. 질구내마을 뒷편으로 갑장산이 있고 앞으로는 질구내라는 하천이 흐른다.
[변천]
연악서원은 1553년(명종 8) 상주목사 신잠(申潛)[1491~1554]이 세운 18서당 중 하나인 지천서당(智川書堂)이 모체이다. 1658년(효종 9)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강당을 복원하였다. 1702년(숙종 28) 공론에 의하여 박언성, 김언건, 강응철을 지천서당에 배향하고 서원으로 승원하였다. 1725년(영조 1) 조정의 금령에 따라 감영에서 잘못 조사하여 서원훼철령이 내려졌으나, 영조의 행차를 기다렸다가 훼철령이 잘못 집행되었음을 상언하였다. 이에 1726년 연악서원 훼철이 철회되었고, 김각, 조광벽, 강용량을 추배하였다. 1870년(고종 7) 훼철되었고, 1900년(광무 4) 서원 자리에 단소를 설치하였다. 1974년 유림들의 공의에 따라 강당을 중건하였다. 1987년 묘우를 복원하였고, 2005년 강당을 중수하였다.
[형태]
연악서원의 사당 창덕사(彰德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1987년 서원을 복원하며 지은 건물이다. 박언성, 김언건, 강응철, 김각, 조광벽, 강용량의 위패가 있다. 묘우 정면은 현재 경지로 활용되고 있다. 묘정으로 출입하는 삼문은 솟을대문이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을 어칸으로 하여 우물마루를 시공하였고, 전면에 빗살 사분합문을 두었다. 지천서당의 편액도 함께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연악서원이 훼철되고 복원할 때 재원의 부족으로 강당을 신축하지 못하고 지천서당의 건물을 함께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현재 연악서원에는 「연악서원 상량문」, 「연악구곡기」, 「연악문회록」, 「복향고유문」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으로 지천서당이 불탄 이후 강당을 새로 중창하면서 연악서원에 관한 내력을 기록하여 놓은 상량문으로 강용량(康用良)이 지었다. 「연악구곡기」는 강응철이 지천서당 앞의 계류를 따라 명명한 것이다. 「연악문회록」은 1622년(광해 14) 연악서원에서 시회를 개최할 때 참석한 15인의 시집이다. 「복향고유문」은 서원이 훼철되고, 다시 복향하는 고유할 때의 고유문이다. 연악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 중해(中亥)일에 향사를 지낸다.
[의의와 평가]
연악서원은 서당에서 서원으로 승원한 내력을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다. 또한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있어 유림의 시문과 창작 활동이 왕성하였던 곳으로 역사 자료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