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1149
한자 尙州 玉洞書院
영어공식명칭 Okdongseowon Confucian Academy, Sangju
이칭/별칭 백옥동 영당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2길 29[수봉리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순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580년연표보기 - 상주 옥동서원 건립
훼철|철거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상주 옥동서원 소실
개축|증축 시기/일시 1595년연표보기 - 상주 옥동서원 재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4년 - 상주 옥동서원 강당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5년 - 상주 옥동서원 청월루 중수
문화유산 지정 일시 2015년 11월 10일연표보기 - 상주 옥동서원 사적 제532호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14년 - 상주 옥동서원 승원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89년 - 상주 옥동서원 사액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상주 옥동서원 사적으로 변경 지정
현 소재지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2길 29[수봉리 546]지도보기
성격 서원
양식 팔작지붕|맞배지붕
정면 칸수 5칸[온휘당|]3칸[경덕사]|5칸[청월루]|3칸[전사청]
측면 칸수 3칸[온휘당]|1.5칸[경덕사]|2칸[청월루]|1.5칸[전사청]
관리자 옥동서원
문화유산 지정 번호 사적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개설]

상주 옥동서원(尙州 玉洞書院)은 방촌 황희(黃喜)[1363~1452], 사서 전식(全湜)[1563~1642], 축옹 황효헌(黃孝獻)[1491~1532], 반간 황뉴(黃紐)[1578~1626]를 배향한 서원이다. 황희는 본관이 장수(長水),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이다. 고려가 멸망하자 은거하다가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 요청에 응하여 관료가 되었다. 세종 대에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8년 동안 국정을 총괄하면서 성세를 이룩하여 조선 왕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전식은 본관이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이다. 류성룡(柳成龍)[1542~1607],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괄의 난 때 태복시정이 되어 왕을 호종하였고,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하였다. 황효헌은 본관이 장수(長水), 자는 숙공(叔貢), 호는 축옹(蓄翁)·현옹(玄翁)·신재(愼齋)이다. 강원도관찰사, 대사성,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황뉴는 본관이 장수(長水), 자는 회보(會甫), 호는 반간(槃澗)이다. 정경세(鄭經世)[1563~1633]의 문인으로 승정원주서, 경성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상주 옥동서원은 2015년 11월 10일 사적 제53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사적으로 변경되었다.

[위치]

상주 옥동서원은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2길 29[수봉리 546] 백화산(白華山) 헌수봉(獻壽峰) 아래에 있다. 헌수봉은 황희 후손들의 세거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황희의 4대손 황맹헌·황효헌 형제가 어머니를 봉양할 때 “집 뒤에 여러 봉우리가 옥처럼 늘어서 있었는데 어머니 건강을 위하여 술잔을 들어 헌수(獻壽)[장수 기원]하면서부터 봉우리를 헌수봉이라 하였는데 여전히 그렇게 부르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헌수봉은 여러 개의 작은 옥봉이 이어져 있어 옥봉 역시 황희 후손들에게 의미 있는 곳이 되었다. 여러 시(詩)에도 등장하는 명소이며, 백화산 헌수봉 아래 옥봉이 이어져 있다고 하여 마을을 백옥동(白玉洞)으로도 불렀다. 옥동서원이 영당으로 출발할 때 이름을 ‘백옥동’이라고 한 것도 백옥동에서 연유한 것이다.

[변천]

1580년(선조 13) 방촌 황희의 5대손 황돈(黃惇)이 향내 사림의 공론을 모아 백옥동 영당을 건립하여 황희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임진왜란백옥동 영당은 전소(全燒)되었고, 1595년 정경세의 제자 황뉴의 주도로 영당을 재건하였다. 1714년(숙종 40) 전식을 배향하고 서원으로 승원하였고, 1786년(정조 10) 황효헌과 황뉴를 추가 배향하였다. 1789년(정조 13) ‘옥동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상주 옥동서원은 흥선대원군 서원훼철령에도 존속하였다. 2004년 강당을 중수하였고, 2005년 청월루(淸越樓)를 중수하였다.

[형태]

상주 옥동서원의 사당인 경덕사(景德祠)는 황희를 비롯한 전식, 황효헌, 황뉴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황희의 영정 모사본이 함께 모셔져 있다. 건립 당시 상량문은 이준(李埈)[1560~1635]의 현손인 이증엽(李增曄)이 지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5칸, 맞배지붕으로 전면에 1칸 정도의 툇마루를 두었다. 묘우의 툇마루를 강회다짐으로 마감하여 다른 묘우와는 약간 다르다.

묘정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내삼문은 솟을대문이다. 강당인 온휘당(蘊輝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3칸을 어칸으로 하였다. 양쪽에는 온돌 통칸으로 북쪽 방은 탁장재(琢章齋), 남쪽 방은 착로재(斲露齋)이다. 강당 상량문은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증조할아버지 채팽윤(蔡彭胤)[1669~1731]이 지었다. 문루인 청월루는 외삼문과 누정이 결합된 조선 중후기 건축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문루의 1층은 외삼문으로 회보문(懷寶門)이고, 2층은 누정으로 중앙의 2칸은 어칸으로 우물마루이며 양옆에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누의 사방에 반 칸의 툇간을 두고, 계자각 난간을 설치하였다. 온돌은 아래층에서 불을 지필 수 있도록 한 고상주택 양식을 취한 복합형 건물이다. 북쪽의 온돌은 윤택료(潤澤寮), 남쪽은 진밀료(縝密寮)이다. 청월루의 상량문은 정종로(鄭宗魯)[1738~1816]가 지었다. 부속 건물로는 백옥봉(白玉峰) 정상의 백옥정(白玉亭)과 전사청(典祀廳) 및 고직사(庫直舍)가 있다.

[현황]

상주박물관에서 기탁 보관하고 있는 상주 옥동서원 자료는 고문서, 성책, 영정, 책판 등이며, 약 246종 397건이다. 특히 『백옥동잡록(白玉洞雜錄)』에는 승원 관련 통문과 승원 봉안례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겠다는 상주목사의 제사(題辭)[題音] 등의 중요한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자료를 통하여 1702년 백옥동 영당이 승원을 위한 도회를 근암서원에서 개최하였으나 향론을 모으지 못하였고, 12년 후 근암서원의 원장 전수장(全守長)[1650~1716]에 의하여 2차 승원 발의가 있은 후 한 차례 더 재발의와 공론을 거쳐 1714년 전식을 배향하여 ‘옥동서원’으로 승격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 『소청일기(疏廳日記)』와 『본원일록(本院日錄)』은 상주 옥동서원에서 추진한 일련의 청액 활동과 사액례 과정을 상세히 밝힌 중요한 자료이다. 상주 옥동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상주 옥동서원은 명재상 황희를 봉안한 영당으로 출발하여 서원으로 승원되고 사액을 받은 역사성이 풍부하다. 또 18~19세기 경상북도 상주 지역 사림이 상주 옥동서원도남서원을 교류의 장소로 활용하였다는 점, 그리고 서원의 1차 사료가 많이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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