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3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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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千石臺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현주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0년 11월 30일 - 「임천석대」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에 4권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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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임천석대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
성격 | 지명 유래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임천석|태종|김광우 |
모티프 유형 | 이전 왕조에 충절을 바친 충신|칭송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에 있는 임천석대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임천석대(林千石臺)」는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에 임천석대가 생긴 유래가 담긴 전설이다. 고려 말엽 악사(樂師)였던 임천석(林千石)이 조선 건국 후 태종(太宗)[1367~1422]의 부름에 나아가지 않고 절벽 아래 깊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고려 왕조에 대한 임천석의 충성심을 기리는 내용이다.
[채록/수집 상황]
「임천석대」는 2010년 11월 30일에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 4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고려 말엽의 악사인 임천석은 고려 패망 후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백화산(白華山)에 와서 은거하였다. 임천석대는 조선 태종이 임천석이 음률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절벽 아래 깊은 물에 떨어져 죽은 곳이다. 향토지 『상산지(商山誌)』에는 원효사(元孝寺) 승려가 불쌍히 여겨 임천석에게 밥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지행록(地行錄)』에는 신라 때의 일로 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정조실록」 46권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전 지평 김광우(金光遇)가 상소하기를, ‘옛날에 고려의 악공 임천석은 고려 말에 거문고를 안고 상주의 화산(華山)에 들어가 매일 높은 바위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뜯으며 탄식하다가 혁명한 소식을 듣고는 거문고를 버리고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는데 지금까지도 임천석대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성취하고 수립한 것이 우주 간에 빛났으나 명성과 지위가 없어 포양할 수 없으니 본관으로 하여금 돌을 깎아 사실을 기록하여 그 충렬을 드러나게 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모티프 분석]
「임천석대」의 주요 모티프는 ‘이전 왕조에 충절을 바친 충신’이다.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거문고를 버리고 바위 아래에 몸을 던진 악사에 대한 칭송이 잘 드러난다. 어느 정권이나 처음 세워졌을 때는 지난 정권에 대한 충신을 인정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평가와 인정을 하게 마련이다. 새 정권에서 부귀와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죽음으로 충절을 드러낸 것은 벼슬아치뿐 아니라 명성과 지위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가치가 크다는 것을 드러낸다.
상주시 모동면의 전설에서는 임천석이 조선 태종의 부름에 나가지 않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고 전하여지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임천석이 역성혁명의 소식을 듣고 바위 아래에 떨어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둘 다 이전 왕조에 대한 충절을 강조하고 있는데, 태종이 직접 임천석을 불렀으나 임천석이 태종의 부름에 대한 불응의 의미로 죽음을 선택하였다는 점에서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상산지』에서 원효사 승려가 밥을 주었다는 것은 임천석이 가난한 가운데서도 충절을 지켰다는 뜻이며, 『지행록』에서 신라 때 일로 전한다는 것은 시대가 달라도 이전 왕조에 대한 충절은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뜻한다.